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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한물 갔다 했지만 … 2만 팬 울린 42세 태지 오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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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18일 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서태지(오른쪽) 9집 컴백 공연 ‘크리스말로윈(크리스마스+할로윈)’. 마법사가 썰매를 끌고 가는 모형이 관객 머리 위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날 아이유·스윙스·바스코가 게스트로 참여했다. [사진 서태지컴퍼니]

5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팬들 앞에서 서태지(42)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 잠깐의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18일 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서태지 9집 ‘콰이어트 나이트’ 발매 기념 콘서트가 열렸다. “보고 싶었어요”라고 말문을 연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팬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췄다.

 판교에서 공연 사고가 난 바로 다음날 열린 대규모 콘서트라는 점에서 안전 문제도 신경쓴 모습이 보였다. 300명이 넘는 안전요원이 형광 조끼를 입고 공연장 곳곳에 배치돼 있었다.

[사진 서태지컴퍼니]

 그가 가요계를 떠나있던 지난 5년은 과거 비밀 결혼과 이혼 사실이 알려지며 ‘서태지 신화’가 걷힌 시간이었다. 지금의 10~20대에게 서태지는 ‘문화대통령’이란 수식어보다 스캔들 기사로 더 익숙하다. 가수나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정체성을 오랫동안 보여주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날의 컴백 공연은 그의 재기를 향한 첫 시험대였다. 일단 무대는 압도적이었다. 크리스마스와 할로윈의 합성어인 ‘크리스말로윈’이란 공연 제목에 걸맞게 성스러움과 괴기스러움이 공존하는 세계를 구현해내려 했다. 천장을 드리운 대형 호박 머리, 무대 양쪽을 장식한 뼈 모형, 성벽과 트리 장식, 객석 위를 날아가는 마법사의 썰매까지 나무랄 데 없는 무대였다. 오후 7시 정각 등장한 서태지는 신곡 ‘소격동’과 ‘크리스말로윈’으로 사운드의 신세계를 보여줬다. 세계적인 음향 엔지니어 폴 바우먼이 조율한 소리는 심장을 두들기는 강력한 파동을 만들어냈다. 악기 하나하나가 세심하게 귀에 들어와 꽂혔다. 2만여 관객은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서태지는 이날 6곡의 신곡을 공개했다. 선과 악의 양면성을 잔혹동화의 컨셉트로 표현한 ‘숲속의 파이터’나 경쾌한 기타소리로 시작하는 ‘프리즌 브레이크’는 미리 공개한 ‘크리스말로윈’처럼 일렉트로닉 장르를 기본으로 여러 장르를 혼합한, 실험성이 두드러진 곡이었다.

 ‘컴백홈’ ‘교실이데아’ ‘하여가’ 등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의 노래가 나오자 함성은 더 커졌다. 90년대를 뒤흔든 명곡들은 지금 들어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아쉬운 점은 공연 중반이 지나면서 서태지의 목소리가 흔들린 점이다. 그가 전형적인 보컬리스트는 아니지만 반주에 목소리가 묻히거나 음정이 떨어진 것은 몰입을 방해했다. 5만석 규모의 주경기장보다는 조금 작은 공연장이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일거에 압도하는 순간이 있었다. 서태지가 신곡 ‘나인티스 아이콘(90’s icon)’을 부를 때였다. 그는 “여러분이 좋아하던 90년대 스타들 많죠. 우리의 스타와 여러분의 인생이 함께 저물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한물간 별 볼일 없는 가수가 들려드립니다”라며 이 노래를 시작했다. 그가 의자에 앉아 나지막이 부른 가사는 이렇다.

 ‘한물간 90’s 아이콘, 물러갈 마지막 기회가 언제일까 망설이네/화려한 재기의 기회가 언제일까 망설이네/해답이 없는 고민, 하지만 밤이 온다면 나의 별도 잔잔히 빛나겠죠.’

 그도 평범한 인간이었음이, 어깨 위에 큰 짐을 지고 살아왔음이 마음에 전해졌다. 자신의 과거사가 상품이 되고 진정성(혹은 진정성 있게 보이는 것)이 대중을 사로잡는 시대에 신화적 존재로서 서태지는 너무 뒤처져 있었다. 그가 이제 자신의 성 밖으로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김효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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