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협상 「테이블」-유고정리 군행본출간앞서 본지독점게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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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77년 내가 이란의「팔레비」국왕방문을 끝낼 무렵 마침 그곳에 와있던 아랍에 미리트연합(UAE) 의 「자예드」토후가 나를 만나자고 요청해왔다. 나는 그가 이란과 UAE사이에 분쟁이 되고 있는 도서에 관해 나와 의논하기를 원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란은 페르시아만에 있는 3개의 아랍에 미리트연합의 섬-그레이트 툼, 스몰러 툼, 아부 무사-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세도서는 UAE를 구성하고 있는 한 토후국의 소유다.

<이란-uae 중재>
나는 「자예드」의 요청을 받자 곧 「팔레비」국왕과의 토의에서 이 문제를 거론키로 했다.
「팔레비」가 이 문제에 매우 민감했지만 나는 그것이 반드시 해결돼야 한다는 점을 납득시켰다.
나는 우리들이 이슬람으로 결속해 있으므로 우리들의 모든 현안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팔레비」왕이 이점을 납득하게 되었다고 느꼈을 때 테헤란의 UAE공관으로 「자예드」를 방문했다. 그는 처음 영빈관으로 나를 방문하겠다고 끈질지게 말했지만 나는 내가 그를 만나러 가겠다고 말했다.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기 위해 공항으로 가던 길에 나는「자예드」에게로 가서 그에게 「팔레비」왕과의 회담에서 교환된 대화내용을 모두 알려주었다. 『당신이 나에게 도서문제를 거론하기 전에 나는 「팔레비」국왕과 그 문제의 해결책을 마련했소』라고 그에게 말했다.
나는 도서문제로 이란과 아랍에 미리트연합을 중재한 사실을 지금까지 밝힌 적이 없다. 나는 그 문제가 정치적 흥정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자예드」와 헤어진 뒤 바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엘 타이프로 날아갔다. 그 곳 방문은 처음이었다. 나는 사우디아라비아 형제들인 「할리드」국왕, 「파하드」황태자 그리고 다른 왕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나는 당시 내가 구상하고 있었던 평화협상 안, 즉 이스라엘과의 적대관계를 종식시킬 제안을 그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때까지 나의 중동평화 협상 안은 최종적으로 구체화되지는 않았다.
그 얼마 전에 나는 중동분쟁의 양당사자에게 평화와 안전을 보장해주도록 5대국 정상회담을 예루살렘에서 개최할 것을 요청할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것은 루마니아로부터 이란으로 「팔레비」왕을 만나러 가는 도중 아라라트 산맥 위를 비행하고 있었을 때 내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러나 몇 가지 이유로 나는 당시 더 이상 그 구상을 진전시키지 않기로 결심했다.
첫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소련공산당서기장 「브레즈네프」가 5대국 정상회담에 참가할 것이냐는 점이었다. 「브레즈네프」가 합리적인 사람이고 나의 친구이지만 정상회담문제에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기에는 여러 가지 정치적인 고려를 해야할 처지였다.
그는 소련의 동맹국인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견해 때문에 제약을 받고있다.
그리고 내가 이집트에 주재하던 소련군사고문단을 추방함으로써 소련에 가한 일격을 그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정상회담 구상을 단념한 두 번째 이유는 중공의 입장 때문이었다. 비록 중공이 아랍 측을 1백% 지지하고 있지만 나는 중공이 유엔안보리에서의 경우처럼 회담참석을 기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우디엔 말 안 해>
세 번째 이유는 일부 정상들이 그들 자신의 일정에 얽매여 6개월 동안은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고 따라서 그들이 내가 제안한 날자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를 기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아라라트 산맥위를 날면서 평화협상 구상의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나는 내가 진정한 평화수호자이며, 나의 평화임상제의가 술수가 아님을 전 세계에 입증해 보이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그 구상을 사우디아라비아 형제들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다.
내가 이집트에 돌아가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를 떠난 뒤부터 평화협상구상은 보다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나의 생각은 간단했다. 나는 왜 목표를 향해 곧 바로 가지 못하고 주변만을 빙빙 돌고 있는가. 나의 명백하고 유일한 목표가 평화였음에도 그 평화는 어떤 상황에서도 실현되지 않았다.
평화는 분쟁당사자들간의 직접회담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또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왜 곧바로 이스라엘에 가지 않고 있는가-. 나는 왜 이스라엘 의회에서 전 세계는 물론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아랍의 입장을 천명하지 못하는가.
나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나의, 그러한 행동에 대한 반응이 어떠할 것인가를 상상해 보았다. 그것은 예측불허의 도박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위험을 무릅쓰고 적을 방문하다니, 그런 모험이 어떻게 가능한가. 무슨 보장이 있는가. 그들이 이전에 팔레스타인에 파견된 UN최고중재역 「카운트·버나도트」에게 자행했던 대로 예루살렘거리에서 총을 쓰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가.

<예루살렘에 가자>
나의 대답은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이 나의 운명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도피할 수는 없다. 나의 죽음의 날은 이미 신에 의해 예정돼있다. 나의 죽음은 예루살렘이건, 카이로에서 이건. 다리 위에서 이건, 다리아래에서 이건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 죽음의 그 순간은 어김없이 다가오고 있다. 어떻게 우리가 전지전능하신 신의 말씀을 잊을 수 있겠는가. 『너희가 어느 곳에 있더라도 죽음이 너를 쫓아올 것이니라. 비록 너희가 튼튼한 성안에 있다 하더라도.』아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마음속에 어떤 전율 같은 것을 느꼈고. 다음 순간에 행복감이나를 압도했다. 그 행복감은 일찌기 느껴보지 못한 그런 것이었다. 그것은 길고 고통스러운 탐구 끝에 진리를 발견한 사람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그런 행복감이었다.
나는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주저하지 않았다. 77년 11윌19일,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비행기에서 내려 예루살렘 땅에 발을 내디뎠다. (여기에 소개된 『평화협상테이블』편은 「제1부」다. 「사다트」는 평화협상부분을 계속 집필할 예정이었지만 그의 죽음으로 끝을 맺지 못했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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