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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의 허구 밝혀 줄 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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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문화공보부는 올해부터 가야문화권의 개발을 시작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가야는 잘 아는 바와 같이 『삼국사기』나『삼국유사』에도 극히 단편적인 기록밖에 없기 때문에 그 역사는 우리 나라 고대사에 있어서 거의 잊혀져 있었다.
따라서 가야의 경역이나 문학의 특색 같은 것도 거의 알려지지 못하였다. 다만『삼국사기』에 금관가야가 532년 신라에 항복한 기록과『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에 역시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의 전설과 약간의 기사가 실려 있기 때문에 가야라면 금관가야를 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늘날은 문헌과 고고학자료에 의해 가야의 경역은 경상남북도를 세로 비스듬히 2분한 서쪽지역인 것으로 밝혀졌다.
해방 후 우리 나라 학자들의 노력으로 가야의 연구와 발굴 등이 행해져서 차차 가야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가야역사에 대한인식이 깊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가야의 역사나 문화의 연구는 아직 초보단계에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가야문화권개발과 관련, 일본측이 주장해온「임나일본부」설의「임나」란 말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가야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삼국사기』나 광개토왕비 등의 김석문에서 금관가야를「임나」라고 한 예가 있는데『일본서기』에서는 여러 가야를 총칭하는 용어로 쓰여졌다.
가야라는 말은「가락」(가락) 「가라」(가라) 「가야」로 음운 변화한 것인데「가야」의 한자표기는 삼국사기는「가야」→ 삼국유사는「가야」, 동국여지승람은「가야」로 쓰여졌다.
「임나일본부」란 용어는『일본서기』의 찬자가 지어낸 말이다. 그것은『일본서기』의 흠명기에서 처음 나타나는데, 이 시대는 6세기로서「일본」이란 국호가 아직 사용되지 않았던 때이므로「일본부」란 말이 8세기에 편찬된 일본서기의 조작인 것이 증명된다.「일본」이란 국호나「천황」이란 왕호는 모두 7세기 이후부터 사용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가야가 존속한6세기까지에는「일본부」란 말이 있을 수 없다.
『일본서기』에 실린 한국과의 관계기사는 대부분이 백제에서 쓰인『백제기』『백제신찬』『백제본기』등의 기록을 자료로 하여 편찬되었는데, 백제 측 기록을 그대로 한 것이 아니라 당시 일본의 국가주의적 사상에 의하여 왜곡·과장 또는 윤색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서기는 가야 뿐 아니라 신라며 백제까지도 일본에 복속 되었던 뜻이 왜곡하였다.
특히 가야에 대하여 ?공기49년(서기369년)부터 정복하여 흠명기23년(서기 562년)에 가야가 신라에 멸망되기까지「임나관가」니「임나일본부」니 하는 통치기관을 두어 가야를, 나아가서는 백제와 신라까지도 지배하였던 듯이 과장하였다.
그러나 ①『일본서기』의 기록자체에도 그러한 기관의 조직이나 통치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된 것이 없고 ②그러한 기관의 유지에는 어느 정도의 군대가 상주하지 않으면 안될 것인데 그러한 사실의 기록이 없다. 다만『삼국사기』나 광개토왕비등의 자료에 의하면 4세기후반부터 신라는 영토를 확장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가야를 침공했으므로 가야는 그것을 견제하기 위하여 일본과 우호관계를 가졌고, 백제는 고구려의 남침을 견제하기 위하여 또한 일본과 친선관계를 맺었다.
또 백제는 신라의 가야침략을 막기 위하여 가야와도 손을 잡았다. 신라는 이에 대항해 고구려와 동맹관계를 맺었다. 당시의 이러한 복잡한 관계는 광개토왕비에도 상당히 자세히 쓰여져 있다. 그래서 일본은 신라에 자주 내침하고, 신라는 때로 고구려의 힘을 빌어 왜를 격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일본서기』에도 상기한 바와 같이 왜곡·과장되어 가야 뿐 아니라 신라나 백제까지도 일본에 복속 되었던 듯이 기술되었다. 이것은 삼국사기나 광개토왕비와 같은 우리측 자료에 의해서 부인될 뿐 아니라, 『일본서기』등 그들의 자료에도 많은 반증이 있다.
더욱이 최근의 가야지역에서 발굴된 고고학 자료들은 기원전3세기께 일본의 야요이(미생)시대부터 기원5, 6세기께의 대화국가의 건국 초에 이르기까지의 일본의 문물은 거처 가야지역으로부터 건너갔다는 것이 증명된다.
그것은 즉 그러한 시대에 가야지역으로부터의 대규모집단이 주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일본문화의 개화(미생문화)와 대화국 건설의 주도세력이 가야인 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고학적인 증거는 이때까지의 가야(임나)에 대한 그들의 시각을 전혀 반대방향으로 돌리게 하는 것이다. 한편 대화국가가 건설된 후에는 백제로부터 유교·불교·예술·공예 등 높은 정신문화를 수용한 사실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한 예를 들면 최근 부산 복천동 고분군 발굴에서 많은 철제 투구, 갑옷과 마면 투구 등이 출토되었는데 그것들은 일본 고분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그 밖의 가야유적에서도 여러 종류의 투구와 갑옷이 발견되었는데 투구에는 차양 달린 투구, 충각 달린 투구, 몽고발형 투구, 갑옷에는 단갑과 ?갑 등 완전히 일본의 그것들과 같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들은 다른 고고학적 자료와 아울러 가야에서 일본열도에 전해진 것이 증명된다. 이밖에 일본건국에 필요한 철재·무기·마구 등도 다 가야로부터 건너간 것이다.
김정학 교수(동국대 경주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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