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회보장번호' 불법 임대사업 판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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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미국 사회보장번호(Social Security Number)를 빌려 드립니다. 연락처 ×××-××××."

20년 전 미국 체류자격을 얻었지만 지금은 고향인 멕시코에 돌아와 사는 헤라르도 루비아노(39)는 최근 비밀 루트를 통해 자신의 사회보장번호를 빌려 쓸 사람을 찾았다. 캘리포니아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는 멕시코인이었다. 두 사람은 돈과 사회보장번호를 맞바꿨다.

미국 체류자격을 갖췄으나 더 이상 거주하지 않는 외국인과 미국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불법 이민자들 사이에 사회보장번호 임대차가 성행하고 있다고 뉴욕 타임스가 7일 보도했다. 신문은 "정확한 규모는 파악하기 어렵다"며 "강력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특히 멕시코 주민들 사이에서 사회보장번호와 취업허가(그린 카드) 등을 임대차하는 행위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에서 외국인이 일자리를 얻으려면 고용주에게 체류 및 노동 자격을 증명하는 서류를 내야 한다. 따라서 서류를 위조하는 불법 체류자들도 있다. 그러나 1년에 한 차례씩 내야 하는 세금보고 때 '가짜 서류'는 들통날 위험이 크다. 합법적인 자격을 갖춘 사람의 신상 정보와 서류를 돈으로 빌려 그 사람 행세를 하는 것이 편하다.

사회보장번호를 빌려주는 사람은 임대료 외에 얻는 게 많아 '꿩 먹고 알 먹고'다. 저소득 근로자에게 돌려주는 세금환급분을 챙길 수 있다. 자신의 신분을 빌린 사람이 내는 사회보장세로 인해 장차 실업 또는 퇴직수당도 받을 수 있다. 미국 체류 및 취업자격을 유지하기 위해선 일정 기간 이상을 미국에 체류해야 하는데 번호를 빌린 사람이 이 기간을 채워준다.

사회보장번호를 빌린 사람이나 빌려준 사람이 먼저 발설하지 않으면 당국이 적발해 내기 매우 어려워 임대업은 성황이다. 세금보고서를 통해선 불법 취업 사실을 가려 내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국토안보부 산하의 이민세관국은 테러 방지에 전념하느라 사회보장번호의 임대차 단속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그러나 사회보장번호를 빌린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거나 물건을 산 뒤 돈을 갚지 않으면 빌려준 사람이 낭패를 볼 가능성이 있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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