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4. 땡볕 <174>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수송선은 중부 베트남의 항구도시인 다낭에 도착했고 우리는 이튿날 LST로 바꾸어 타고 출라이로 갔다. 이곳에는 미군의 육해공군과 해병대의 혼성 지원기지가 있었고 외곽에는 미 육군 아메리칼 사단이 주둔했다. 이 사단은 나중에 켈리 중위가 지휘한 소대병력의 '밀라이 학살사건'을 저지른 부대다. 우리는 제일 먼저 열대지방의 후끈한 대기와 짙푸른 초록의 음산한 정글과 마주쳤다.

미군기지는 해안을 따라서 모래밭 위에 엄청난 대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 LST에서 내려 상륙했을 때 모래 먼지가 일고 있는 광대한 벌판 위에서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것은 거대한 고철의 산더미였다. 포탄 껍데기와 부서진 중장비들과 레이션 깡통들이 벌겋게 녹슨 채로 곳곳에 쌓여 있었고, 주위에는 야전 변소의 인분과 식량 찌꺼기를 태우는 기름 연기가 검게 올라가고 있었다.

이 대륙에서의 첫 밤을 함상(艦上)에서 새웠을 때, 검고 짙은 어둠 저 너머로 아시아의 또 다른 불빛들이 명멸하고 있었는데, 집들의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아니라 탐조등과 조명탄과 작렬하는 포탄, 그리고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헬리콥터의 불빛이었다. 그때 나는 상갑판의 쇠줄 난간에 그네를 타듯 걸터앉아서, 약간의 기대와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파도를 타고 내게로 전해오는 저 미지의 대륙의 아우성과 고통을 감지하고 있었던 듯 하다. 새벽이 되어 낯선 태양이 바닷속으로부터 솟아올랐을 때, 불어오기 시작한 바람 속에서 내가 제일 처음 맡은 냄새는 소금 냄새나 대지와 숲의 냄새도 아닌 가솔린 냄새였다.

출라이 군항에서 기지 영내를 지나 해병여단 사령부까지 가는 길은 이른바 베트남 국도 '1번 도로'였다. 이것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베트남 반도의 남쪽 사이공에서 북으로 하노이에까지 이르는 멀고 긴 도로다. 길 양편에는 짙은 밀림이었고 중간중간에 작은 마을과 큰 읍내와 도시가 서로 연결되고 있었다.

그때로부터 38년이나 지난 재작년인가 다낭과 호이안 사이의 1번 도로를 답사한 적이 있었는데, 도로의 폭이나 마을의 모습이 당시와 거의 같았지만 짙었던 숲들이 많이 사라지고 먼 데까지 내다보일 정도로 헐벗은 땅들이 여러 군데 보였다. 길가의 마당 앞에서 한가하게 모이를 쪼는 닭들이나 평상 아래 다리를 죽 뻗고 잠들어 있는 개, 또는 곰방대를 물고 둘러앉아 집 앞에서 차를 마시는 노인들의 모습이 가슴 뭉클할 정도로 평화로워 보이는 것이 예전과 다른 풍경들이었다.

앞뒤로 무장 호송차가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가운데 우리 트럭에 탄 병력도 실탄을 장전하고 총구를 양 옆의 정글 쪽으로 겨누고 있었다. 우리가 여단 본부 영내의 대기 막사에서 군장을 풀던 날, 가까운 곳에서 귀청을 찢을 듯이 쏘아대던 포성과 외곽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던 자동화기의 사격 소리 때문에 전혀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