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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화요일] 인간 대신 로봇 출장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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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TED 무대에 폭로로 유명한 남자 한 분을 소개합니다.” 올해 3월 18일 TED가 열린 캐나다 밴쿠버 컨벤션센터. TED 기획자 겸 사회자인 크리스 앤더슨이 예정에 없던 연사 한 명을 깜짝 소개했다. 주인공은 에드워드 스노든(30). 그의 이름이 호명되자 객석엔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소속이던 스노든은 지난해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기밀 감시 의혹을 폭로했다. 그는 미국 정부로부터 국가 기밀 유출 혐의를 받고 있어 미국과 동맹관계인 캐나다엔 드나들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푸른 무대 커튼 뒤에서 걸어나온 것은 스노든이 아니라 바퀴 달린 모니터였다. 모니터엔 환하게 웃고 있는 스노든의 얼굴이 크게 잡혔다. 사회자는 “스노든이 러시아 어딘가에서 랩톱으로 원격 조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스노든은 “여러분이 다 보이니 아주 신기하다”며 모니터를 앞뒤로 돌려봤다. 그는 30여 분간 TED 무대에서 열변을 토한 뒤 객석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다시 커튼 속으로 돌아갔다.

빔 가격 : 2만 달러 : 158.5cm 통신방식 : WiFi/4G LTE 배터리 : 8시간 디스플레이 : 17인치 LCD 특징 : 광각 카메라 2개?마이크로폰 6개 장착, 시속 1.6㎞로 이동

 스노든이 원격 조종한 것은 최근 로봇산업계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텔레프레전스 로봇(Telepresence Robot)’이다. 이동통신이나 와이파이(WiFi)를 이용해 먼 곳에 있는 로봇을 조종하면서 마치 현지에 있는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대화도 나눌 수 있는 시스템을 일컫는다. 형태와 기술은 비교적 단순하다. 사양에 따라 다르지만 뼈대만 추려본다면 아이패드와 같은 태블릿PC에 바퀴를 달아놓은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주위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키 높이를 맞췄고, 전후좌우로 움직일 수도 있다.

 스마트폰을 통한 영상통화와 뭐가 다른가. 그렇지 않다. 영상통화는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 앉아 정부세종청사에 모인 장관들과 영상회의를 하는 것이다. 반면에 텔레프레전스 로봇의 경우 박 대통령이 로봇의 몸을 빌려 세종청사 곳곳을 돌아다니며 업무 지시를 하고 회의를 주재하는 형태다.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는 것이다.

 올 들어 텔레프레전스 로봇은 세계 곳곳에서 경쟁적으로 출시되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 로봇업체 아이로봇은 올 3월 세계 최대 네트워크 장비업체 시스코시스템스와 공동 개발한 텔레프레전스 로봇 ‘아바500’을 출시했다. 이 로봇은 아이로봇의 모바일 로봇 플랫폼에 시스코의 화상회의 시스템 ‘EX60’을 결합한 제품이다. 뉴욕 사업가가 서울에 업무가 있다면 직접 출장을 갈 필요 없이 아바500을 이용하면 쉽게 해결된다.

 올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14에는 더블로보틱스라는 업체가 텔레프레전스 로봇 ‘더블’을 공개했다. 원통형 바퀴 세트 위에 길쭉한 파이프를 세우고 그 위에 아이패드를 올렸다. 다른 한쪽의 아이패드에선 전용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로봇을 조종하고, 화상채팅처럼 로봇을 통해 대화를 나눴다. 가격은 2500달러(약 268만5000원), 쓰기에 따라 8~10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고 이 업체는 소개했다.

 CES 2014에서 공개된 또 다른 텔레프레전스 로봇 ‘빔(Beam)’은 미국 로봇회사 수터블테크놀로지의 작품이다. 이 회사는 ‘빔’을 이용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상을 구상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 빔을 설치해 ‘빔 계정’을 가진 사람이 웹캠과 인터넷으로 원하는 곳은 세계 어디든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당장은 뉴욕 본사의 임원이 세계 곳곳의 빔 네트워크를 이용해 런던 지사 회의에 참석한 뒤 곧바로 샌프란시스코나 홍콩의 지사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정도의 시스템을 갖췄다.

 독일 자동차회사 아우디는 텔레프레전스 로봇을 이용해 정비사를 원격 지원해 감독할 수 있는 시스템(Audi Robotic Telepresence)을 준비 중이다. 본사의 A급 정비사가 이 로봇을 이용해 세계 각국에 있는 아우디 딜러 정비사와 얘기도 나누고 차의 상태도 점검하면서 정비를 도울 수 있다. 아우디는 텔레프레전스 로봇 시스템으로 정비의 속도와 정확성을 끌어올리고, 고객에게 더 질 높은 서비스를 하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299달러(약 32만원)짜리 초저가형 텔레프레전스 로봇도 나왔다. 인봇테크놀로지라는 기업이 내놓은 ‘패드봇’이란 이름의 이 로봇은 90㎝의 키에 목이 긴 거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적외선 센서를 이용해 장애물을 피할 수 있고, 난간처럼 떨어질 수 있는 곳에 접근하면 스스로 이를 감지해 내고 멈추는 기능이 있다. 전후좌우로 움직이는 것은 물론 상대방 눈높이에 맞춰 고개(모니터)를 들고 내릴 수도 있다.

 이처럼 해외 로봇 개발 열기가 뜨겁지만 한국은 조용하다. 중소 로봇전문업체 로보쓰리가 2007년 티봇이란 이름의 텔레프레전스 로봇을 개발한 이후 고군분투하고 있는 정도다.

 모니터에 바퀴를 달아놓은 것밖에 없는 듯한 단순한 기술의 이 로봇이 왜 갑자기 뜨기 시작했을까. 답은 ‘통신의 발전’에 있다. 텔레프레전스 로봇은 로봇과 통신이 융합한 경우다. 유선 인터넷의 속도가 느리고, 이동통신도 음성통화나 인터넷만 하던 시절엔 텔레프레전스 로봇의 상용화가 어려웠다. 하지만 최근 들어 광랜 인터넷망과 최대 100Mbps의 속도가 보장되는 4세대 롱텀에볼루션(LTE) 이통통신망까지 나오면서 장애가 많이 해소됐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김도영 스마트워크연구실장은 “실제 생활에서 평균 10Mbps 이상의 속도가 유지되면 고화질(HD)의 영상통화를 할 수 있다”며 “앞으로 텔레프레전스 로봇 산업은 통신의 발전과 함께 사회 각 분야로 시장을 넓혀가며 현재로선 예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가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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