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가 있는 아침 ] - '휴대폰'부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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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오세영(1942∼ ), ‘휴대폰’

창조는 자유에서 오고
자유는 고독에서 오고,
고독은 비밀에서 오는 것,
사랑하고, 글을 쓰고, 생각하는 일은
모두 숨어 하는 일인데
어디에도 비밀이 쉴 곳은 없다.

이제 거대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되었구나.
각기 주어진 번호표를 가슴에 달고
부르면 즉시
알몸으로 서야 하는 삶.

혹시 가스실에 실려가지 않을까,
혹시 재판에 회부되지 않을까,
혹시 인터넷에 띄워지지 않을까,
네가 너의 비밀을 지키고 싶은 것처럼
아, 나도 보석 같은 나의 비밀 하나를
갖고 싶다.

사랑하다가도, 글을 쓰다가도,
벨이 울리면
지체없이 달려가야 할 나의 수용소 번호는
016-909-3562.


그녀(휴대폰)의 울음은 매번 나를 달뜨게 한다. 그러나 술집 나설 때에야 마담의 미소에 깜박 속았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경청 이후에야 그녀의 간절한 울음 절박한 사정과 무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을 증오로 갚고 떠나는 연인처럼 언젠가 그녀가 돌변하여 비루하지만 치명적인 생의 비밀을 속속들이 누설할는지 모른다. 매번 자지러지게 울지만 그녀가 전해주는 사연이란 추수 끝난 벌판의 검불 같은 것들이 태반이다.

이재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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