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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전략] 26%의 힘을 ‘전체’로 둔갑시킬 수 있는 과반의 마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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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호 28면

1987년 9월 18일 국회의장실에서 이재형 국회의장(가운데)과 여야 원내총무들이 6공 헌법안을 마주 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당시 국회에 접수된 개헌안엔 264명의 국회의원들이 서명했다. 왼쪽부터 신민당의 정재원, 민정당의 이대순, 이 의장, 민주당의 김현규, 국민당의 양정규 총무. [중앙포토]

세월호특별법과 관련한 논쟁에서 한쪽은 자신의 의견을 ‘유가족 뜻’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쪽은 자신의 주장을 ‘국민의 뜻’이라고 규정한다. 모든 유가족의 입장이 100% 똑같지는 않을 테고, 더욱이 국민의 생각도 똑같을 수가 없다. 생각이 어느 정도 공유돼야 ‘유가족 전체의 뜻’ 또는 ‘국민 전체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② 돌고 도는 ‘국민의 뜻’

지금으로부터 딱 27년 전인 1987년 10월 12일 국회는 개헌안을 대다수의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재적 의원 272명 가운데 258명이 표결에 참여했고 254명이 찬성했다. 보름 후 실시된 국민투표에서도 투표자의 93%가 찬성해 현행 헌법(제10호 헌법)이 탄생했다. 이 정도면 국민의 뜻이라고 해도 별 이의가 없다.

민주주의와 어긋나는 유신헌법이나 제5공화국 헌법에 대한 국민의 뜻은 어땠을까. 72년 11월 실시된 유신헌법안 국민투표에선 찬성표가 90% 이상 나왔다. 80년 10월의 제5공화국 헌법안 국민투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정치 상황을 감안한다면 국민이 그 두 헌법안을 최선으로 봤기 때문에 찬성한 것은 아니다. 그냥 국민 다수가 이전 헌법보다 새 헌법이 더 나을 거라고 판단한 데 불과하다. 헌법안에 대한 정당이나 사회인들의 의견 개진이 금지된 상황에서 72년의 국민 다수는 정국 불안정의 제3공화국 헌법보다 유신헌법이 더 낫다고 생각했고, 80년의 국민 다수는 장기 집권의 유신헌법보다 단임제의 제5공화국 헌법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제5공화국 헌법의 추진세력은 국민들 눈에 유신헌법보다 나은 헌법만 제시하면 된다는 전략적 판단을 했을 것이다. 이어 87년의 국민 다수는 대통령을 직접 뽑지 못하는 제5공화국 헌법보다 직선제 대통령제의 현행 헌법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현행 헌법 대신에 내각제(제2공화국형) 헌법이나 대통령 중임제(제3공화국형) 헌법을 국민 다수가 선택할 가능성도 있다. 일부 여론조사에 따르면 현재 5년 단임 대통령제보다 4년 중임 가능 대통령제가 더 높은 국민 지지를 받고 있다. 과거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헌법이라 해도 시간이 지난 뒤엔 또다시 국민 다수가 지지하는 새로운 헌법으로 교체될 수 있다. 국민 전체의 뜻은 돌고 돈다.

개헌이라는 국민의 뜻을 확인할 때 90% 찬성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과반수 투표와 투표자 과반의 찬성만 있으면 된다. 다만 국민투표 이전에 국회의원 재적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도록 규정해 가급적 더 많은 동의를 구하도록 하고 있다. 개헌안 의결 외에도 대통령을 탄핵소추하거나 국회의원을 제명할 때에도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또 재적 의원 과반수 찬성이나 출석 의원 3분의 2 찬성을 요구하는 사안도 있다. 나머지 대부분의 의결에는 재적 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 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하는 게 현행 헌법 49조의 내용이다.

‘재적 과반수 출석, 출석자 과반 찬성’으로 전체의 뜻을 결정하는 것은 가장 흔한 민주주의 원칙이다. 이 다수결 원칙에서는 극단적인 경우 재적 26%가 전체의 뜻을 결정할 수도 있다. 예컨대 재적 100명 가운데 찬성 26명, 반대 74명이라고 하자. 반대파 가운데 25명만이 출석하고 찬성파 26명은 전원이 출석한다면 26대 25로 통과된다.

출석자 과반 찬성이 확실할 경우 반대파는 어떤 전략을 구사할 수 있을까. 출석자가 과반에 미달해 의결 자체가 진행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아프거나 출장 중이라 출석이 불가능한 의원들은 늘 있게 마련이다.

링컨 대통령은 주 의원 시절 출석자 과반 찬성을 확신한 상대 정파가 의사정족수를 채우기 위해 의사당 출입문을 봉쇄하자 의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창문으로 뛰어내리기도 했다.

국회 의결에 51% 대신에 대략 60%의 동의가 필요하도록 만든, 이른바 국회 선진화법은 어떤가. 폭력 국회를 예방하기 위해 도입했다고 하지만 사실 몸싸움을 하고 안 하고는 의결정족수와 별로 상관이 없다. 표결에 지면 49%뿐 아니라 20%도 몸싸움을 벌일 수 있다. 지금의 국회는 의안이 통과되지 않기 때문에 몸싸움이 없는 것뿐이다. 통과에 많은 찬성을 요구할수록 아무런 결정을 하지 못하는 이른바 식물국회가 될 가능성은 높다. 국회 선진화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법이 헌법이나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과반수 출석, 출석자 과반 찬성’으로 의결한다는 헌법 49조에 위배된다고 한다.

아렌트 레이파르트(Arend Lijphart) 같은 여러 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다수결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해 왔다. 인종·종교·언어·출신지역 등에 의해 다수 집단과 소수 집단 간의 구분이 뚜렷한 사회에서는 소수 집단이 지속적으로 정권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권력을 지지의 비율만큼만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도권 내에서 자신의 의사를 반영시킬 수 없는 소수 집단은 폭동이나 시위와 같은 비제도적인 방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51%의 지지를 얻은 정파에 권력의 51%를, 49%의 정파에 권력의 49%를 부여하는 비례대표제나 각 정파가 자치권을 갖고 전국적 이슈에는 거국적 합의로 추진되는 합의제를 제안한다.
다수결과 만장일치제를 포함해 어떤 결정 방식이 민주적일까. 7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케네스 애로(Kenneth Arrow)는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이 존재하지 않음을 수학적으로 증명한 바 있다. 애로가 말한 민주주의 조건은 ①어떤 후보끼리도, 어떤 정책 대안끼리도 경쟁될 수 있어야 하고 ②그 경쟁의 결과는 제3의 후보나 정책 대안이 있고 없음에 따라 달라지지 않아야 하며 ③후보나 정책 대안 간의 우열 관계는 순환되지 않아야 하고 ④전원이 더 선호하는 후보나 정책 대안은 그렇지 않은 대안보다 우선적으로 선택되어야 하며 ⑤집단의 선택이 특정 개인의 선호와 늘 완전히 일치해서는 안 된다는 다섯 가지다.

애로의 ‘민주주의 불가능성 정리’를 달리 표현하자면 어떤 방식이 위 1, 2, 4, 5번의 네 가지 민주주의 조건을 충족시킬 때 그 방식에 의한 후보나 정책 대안 간의 우열 관계는 순환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국민의 뜻이 대통령 중임제보다는 내각제를, 또 내각제보다는 대통령 단임제를 원한다면 상식적으론 대통령 중임제보다 단임제를 원하는 게 국민의 뜻이어야 한다. 이것이 위 3번의 비(非)순환성 조건인데 현실은 늘 그렇지가 않다. 국민이 단임제보다 중임제를 선호한다면 이는 세 가지 권력구조에 대한 국민 선호의 우열 관계가 순환되는 것이다.

심지어 만장일치제에서도 우열 관계가 돌고 돌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통일 이슈에 대해 여당·야당·북한의 주장이 각기 다르고 그런 주장에 대해 국민이 각각 전체의 35%, 5%, 60%를 차지하는 ①, ②, ③으로 나뉘어 있다고 하자.

①35%: 야 > 여 > 북
(야당, 여당, 북한의 제안 순으로 선호)
②5%: 야 > 북 > 여
(야당, 북한, 여당의 제안 순으로 선호)
③60%: 여 > 야 > 북
(여당, 야당, 북한의 제안 순으로 선호)

만장일치제를 채택하는 경우 여당안과 야당안 가운데 양자택일하는 결과는 무승부다(여≡야). ①+②의 국민 40%가 야당안을 지지하지만 60%의 국민 ③이 여당안을 지지하여 어떤 제안도 만장일치로 지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장일치제에 의해 여당안과 북한안 만 놓고 양자택일하는 결과도 무승부다(북≡여). ①+③의 국민 95%가 여당안을 선호하는 반면에 ②의 국민 5%는 북한안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야당안과 북한안 간의 대결에서는 야당안이 채택된다(야≫북). ①, ②, ③ 세 집단 모두 북한안보다 야당안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위 세 가지 우열 관계를 종합하면 ‘여≡야≫북≡여’다. 이는 순환되는 우열 관계다. 즉, 야당안은 북한안보다 만장일치로 더 선호되고 그 야당안과 비기는 여당안 또한 북한안에 이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북한안은 야당안과 경쟁한다면 존속할 수 없겠지만 여당안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름 생명력을 갖는다.

이이제이(以夷制夷)와 같은 전략으로 결과를 뒤바꿀 수 있는 경우는 대체로 이런 순환 관계에서다. 고전적 순환 관계는 오행(五行) 간의 상극 관계다.

수극화(水克火): 물이 불을 끈다.
화극금(火克金): 불이 쇠를 녹인다.
금극목(金克木): 쇠가 나무를 방해한다.
목극토(木克土): 나무가 흙을 황폐화시킨다.
토극수(土克水): 흙이 물을 흐리게 한다.

이에 따라 오행 간의 우열 관계는 다음처럼 순환된다. … 》水(물) 》火(불) 》金(쇠) 》木(나무) 》土(흙) 》水(물) 》…. 이 상극 관계와 더불어 상생 관계도 존재한다.

목생화(木生火): 나무가 불을 지핀다.
화생토(火生土): 불탄 재가 흙을 살찌운다.
토생금(土生金): 흙은 광물을 만든다.
금생수(金生水): 광물은 좋은 물을 만든다.
수생목(水生木): 물은 나무를 돕는다.

물이라는 천적을 둔 불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림>의 土-水-火 삼각형에서 불은 화생토(火生土), 즉 자신이 도울 수 있는 흙(土)을 이용해 그 흙이 물을 극(土克水)하게 해 물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이는 상생 관계로 천적을 극복하는 방식이다.

이런 전략이 없다면 불은 물에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지만 순환적 상황을 이용한 전략적 사고로 그런 천적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물(水)도 자신이 키우는 나무(木)로 천적 흙(土)을 극복할 수 있다. 나무(木)와 쇠(金) 역시 유사한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약점은 있게 마련이다. 그 물고 물리는 관계는 대체로 돌고 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권력도 언젠가는 무너진다. 정치인들은 국민의 뜻이라는 단어를 자주 입에 올린다. 쿠데타의 주역들도 자신의 행위가 국민의 뜻이라고 말한다.

만장일치의 국민 뜻도 돌고 돌 수 있는데, 하물며 다수결이나 특정 집단에 의해 결정된 뜻은 더더욱 무너지기 쉽다. 개인 의지의 총합과 구분되는 ‘일반 의지’ 그리고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시대정신’이니 하는 말도 절대적이지 않을뿐더러 언젠가는 바뀌는 법이다. 그런 상대성을 활용해 세상을 바꾸는 것이 바로 전략이다.



김재한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로체스터대 정치학 박사. 2009년 미국 후버연구소 National Fellow, 2010년 교육부 국가석학으로 선정됐다. 정치현상의 수리적 분석에 능하다. 저서로는 『동서양의 신뢰』 『DMZ 평화답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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