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 최창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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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가까이서 멀리서 자주 죽음의 소식을 듣는다. 어떤 형태로든 인연이 맺어진 사람의 죽음으로 좋건 싫건 더러 문상을 가기도한다.
죽음쳐놓고 쓸쓸하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겠는가만 대개의 경우 나는, 평범하게 살다가 죽은자의 평범한 상가보다도 화려하게 살다가 죽은 자의 화려한 상가에서 더 큰 쓸쓸함을 느낀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살아 생전에 부나 명예나 권력을 누릴 만큼 누려 죽어서까지 떠들썩한 집안이 왜 더 쓸쓸하게 느껴진단 말인가.
내 의식이 남달리 병이 들어서일까. 아니면 죽어서까지 떠들썩한 그들의 부나 명예나 권력앞에 자신의 초라함이 인식되어서일까.
그도 아니면 낡은 속담에서 처럼 「정승집의 개가 죽지 않고 정승이 죽었기때문에」상상했던 것보다는 조금은 덜 몰려든 것 같은 문상객들의 숫자가 신경에 쓰여서일까. 또 그도 아니면 부나 명예나 권력이라는 것도 죽음 앞에선 참으로 얼마나 허망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새삼 깨달아서일까.
결코 그러한 이유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화려한 삶을 살았던 자들의 상가라고 해서 무조건 다 그런 쓸쓸함을 안겨줄 리 없다. 나의 그것은 어쩌면 하나의 안타까움, 말하자면 화려하게 사는 자가 더욱 화려하게 살려고 아득바득 기를 쓰다가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을 경우, 그 잘못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오는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잘사는 자가 보다 더 잘살기위해, 이름을 얻고있는 자가 보다 큰 이름을 얻기위해, 벼슬자리에 있는 자가 보다 더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그 잘못은, 도저히 피할수 없어 저지른 평범한 사람들의 그것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가령 다달이 몇억씩 벌어들이는 기업주가 좀 더 큰재벌이 되기 위해 심지어 무슨 의연금까지 가로채는 짓을 저지르다가 죽었을경우, 또는 가령 대학의 교수로 있는 자가 학장자리를 따기위해 돈으로 박사학위를 사려다가 죽었을 경우, 또는 가령 무슨 협회의 우두머리가 그 자리를 계속 고수하기 위해 정관까지를 뜯어 고쳐놓고 죽었을 경우를 상상해 보자.
아니,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죽음들에 접했을떼 문상을 가서 어느 누군들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그들의 그런 잘못은 평생을 범법자로 살다가 죽은 자들의 잘못에 비한다면 한낱 사소한, 사람이기 때문에 저지를 수 있는 가벼운 실수 정도로 합리화되어 마땅할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 극히 사소한 것같은 그 잘못 하나를 이유로 그들이 평생을 통해 이룩한 부나 명예나 권력을 향해 그들이 죽는 순간 침을 뱉을 정도로 냉혹하다. 경우야 좀 다르지만 가깝게 우리문학사를 통해봐도 그렇다.
불후의 많은 작품들을 남기고서도 지조를 한번 굽혔다고 해서 외면당하고 있는 문인이 얼마든지 있는것이다. 부나 명예나 권력을 누리며 사는 사람일수록 더욱 곰곰 생각해 볼일이다. <소설가>
▲41년 전북익산출생▲고려대·대학원 국문과 졸업▲「창조과 비평」통해 데뷔▲단편집 『물을수 없었던 물음들』『가사자의 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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