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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좌절과 방황딛고…|나와「신춘중앙문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해마다 겨울의 초입에 서면 나는 내 스무살 고비에 앓았던 열병으로 하여 지금도 가슴 써늘해지는 설렘을 맛보고 한다. 詩- 아무도 대단하게 여겨주지 않는 그것에 바쳤던 내 좌절과 회의의 매듭은 나말고 누가 더듬어 만질 수 있으랴! 시 때문에 나는 너무 많은 댓가를 치렀던 것 같다.
대학 2학년 때, 우연히 쓰기 시작한 몇편의 시가 그해 신춘문예의 최종심사에 오르게된 뒤 부터, 나는 중병을 치르고 회복하는 과정으로 한해씩을 고스란히 보내버렸다.
대학을 마친 뒤, 견딜 수 없는 절망감 하나 뿐으로 나는 무작정 동두천에 찾아들었다. 그곳에서의 몇 개월도 더욱 참담한 방황과 패배의 연속이었다.
어줍잖던 교사노릇이 한장의 입대영장으로 마감되자, 나는 그동안의 시고들을 모두 불살라버리고선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하였다.
그러나 72년11월 3년만에 서울로 돌아왔을 땐, 신문마다 게재되기 시작한 신춘문예 공고가 뜻 모를 충격과 정열로 새롭게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밤낮 없이 시를 썼던 보름새에 나는 10여편의 시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12월초에는 원양어선을 타고 떠나는 형을 건송하려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가난한 집안 형편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배를 타는 형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끝에 나는 한편의 시를 써서 책갈피에 끼워 드렸다. 그것이 뒤늦게 우송되어 당선작이 된「출항제」였다.
20대의 한 고빗길에서 나는 시를 위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였다. 신춘문예-그 일회적인 절차에 나는 열광했다. 어차피 바탕없이 누렸던 행운이라면, 일회의 박수를 끝으로 누구나 잊혀져 가는 것이 당연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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