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276>|제75화 패션 50년|외래어 남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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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l976년 전국적으로 국어순화운동의 물결이 일자 사람 이름은 물론 상품이나 상호까지 순수 우리말로 지은 이름들을 뽑아 시상을 하는 한편 우리 생활 주변에 널려 있는 외래어를 추방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나는 국어학자도, 한글 전용론자도 아니지만 우리 말을 아끼고 다듬으려는 뜻있는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남다른 애국심을 가져서라기 보다는 이 문제에 관해 내 나름대로 늘 느껴온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름 아니라 우리 패션계처럼 외국어가 행세하는 분야도 달리 없다는 사실이 항삼 마음에 걸렸었기 때문이다.
잠깐 큰길에 나가보면 누구나 발견하는 것이지만 양장정이나 의상실의 상호는 거의가 다 외국어로 붙여져 있다.
뿐만 아니라 내노라 하는 유명디자이너의 과반수는 영어나 불어 혹은 이탈리아어의 외국 이름을 고유의 성씨 앞에 달고 있다.
도대체 언제부터 왜 디자이너라면 ××강, ×××허 라는 식으로 외국이름을 앞에 내세우는 이상한 풍조가 생겨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붙인 사람 자신이나 정확한 철자나 의미를 알까, 일반에게는 그것이 어느 나라 말인지조차 아리송한 꼬부랑 발음의 외국 이름을 멀쩡한 한국 성씨 앞에 굳이 갖다놓아야만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 디자이너, 혹은 그 의상실이 외국에까지 체인점을 두고 있거나 외국인만을 고객으로 하는 특수한 입장이라면 또 그런대로 수긍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외국이름으 쓰고있는 디자이너의 대다수가 이 땅에서 같은 동포를 고객으로 활동하고 있으면서 격에 어울리지 않게 아무런 연관도 없는 외국 이름으로 행세한다는 것은 열번 스무번 다시 생각해봐도 합당한 이유를 발견할 수가 없다.
게다가 더욱 한심한 것은 『디자이너로서 출세하려면 외국 이름을 붙여야만 한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진 젊은 의상학도들이 꽤 있다는 점이다.
물론 실제로 디자이너로서 명성을 얻은 이들 중에 상당수가 외국 이름을 쓰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외국이름이 특이하게 느껴져서 일반에게 빨리 알려지고 쉽게 기억되는 잇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디자이너란 대중의 인기를 목표로 하는 연예인이 아니라 착실한 실력이 우선해야 하는 엄연한 전문직업인이란 사실에 입각해 볼 때 자신의 진로에 정진하기보다는 헛된 명성이나 얻으려하고 땀 흘리는 수고 없이 하루아침에 부를 쌓으려는 경박한 사고방식은 경계해야만 할 일이다.
그렇다고해서 외국이름을 가진 디자이너 모두가 바람직하지 못한 이들이란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다만 중진국의 선두대열에 낄 만큼 우리나라도 성장했고, 섬유 패션산업이 중요 수출 기간산업으로 발전한 지금 우리 패션계 종사자들도 좀더 확고한 주관과 자기확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이왕 의국이름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만 더하기로 하자.
72년 도미했을때 당시 뉴욕 FIT에서 공부하고 있던 2남 현장이 졸업 후 뉴욕에다 점포를 내고싶다고 하면서 『어머니, 순수한 우리말이면서도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쉬운 그런 상호가 뭐 없을까요?』하고 물어왔다.
그래서 그때 모자가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낸 것이 오늘의「와라」라는 상호다.
「와라」는 이리로 오라는 뜻의 순수 우리말로서 피난시절 귀에 익은 투박하면서도 정겨운 대구 지방의 사투리 어감을 상기하고 지은 것이다. 비단 어감뿐 아니라 그 적극적이고 행동적인 의미가 진은 주로 다루는 젊은 세대의 의상상표로는 썩 잘 어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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