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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듣기 힘든 말 '우리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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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재숙
정재숙 기자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정재숙
논설위원 겸 문화전문기자

은행 업계에서 일하는 이로부터 그 얘기를 듣고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 쪽 사람들은 ‘우리은행’을 지칭할 때 살짝 비틀어서 부른다는 것이었다. 이름 하여 ‘워리은행’이라나. 제3자의 명칭이 1인칭 복수의 일반 호칭과 같다 보니 생긴 일이다. 한국인이 ‘우리’라는 단어에 대해 품는 정서에는 확실히 남다른 점이 있다. 특정한 은행의 이름이 그렇게 지어진 까닭이 다른 데 있겠는가.

 ‘엔트로피’를 비롯해 자연과학적인 개념으로 사회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많이 있었지만 최근에 들은 흥미로운 명제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존재는 자신의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외부의 무질서를 초래한다.’ 이 말을 쉽게 이해하자면 이런 것일 게다. ‘굶주린 산돼지가 감자밭을 침범해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다.’ 산돼지는 자기 내부의 질서를 평온하게 유지하기 위해 감자가 많이 필요한 것이다.

 원시시대 인류에게 배고픔은 일상적인 일이어서 신체를 안정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먹을 것을 찾아 움직여야만 했다고 한다.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현재 50대 이상 한국인들은 ‘밥 찾아먹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훈육 받은 기억들이 있으니까.

 어쨌거나 안팎 질서의 모순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별 볼일 없는 ‘털 없는 원숭이’들이 지구라는 별의 주인이 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다른 종의 생명체들이 공황 상태에 빠졌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을 당시 미시시피 강변 나무 위의 다람쥐는 땅에 내려오지 않은 채 대서양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지금 이 21세기에 이르도록 여전히 아마존의 원시림이 위협받고 있다는 믿기지 않는 현실도 엄연하다.

 인류문명의 진화는 따지고 보면 ‘우리’의 범위를 넓혀 온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 앞에 평등한 개인’으로부터 출발한 서구사회에서 건강한 공동체의 형성이 쉬웠던 데 비해 동양 사회는 아무래도 불리했던 듯싶다. 조선시대, 양반과 상놈의 구별이 엄격했던 당시에 성립될 수 있었던 ‘우리’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의 범위를 한껏 넓히면 사해동포주의를 넘어 동물보호, 아마존 원시림 지키기 운동에까지 이르게 된다. 오늘 강원도 평창에서 개막하는 제12차 생물다양성 당사국총회 본회의 주제는 ‘지속가능 발전을 위한 생물다양성’이다. 지구별을 잠시 접수한 종(種)일 뿐인 인간은 범고래와 꽃과 나무들에게도 생존의 권리를 보장하는 동물해방론이나 식물복지론을 껴안아야 한다.

 반면 ‘우리’의 범위를 극한으로 좁히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이때는 오로지 최소 단위의 가족 외의 모든 공동체는 와해되고 총칼을 지닌 자들만으로 동아리가 성립된다. 그들 외의 누구라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며, 극악한 경우 자칫 집단 희생의 제물이 되기 십상이다. 살아남은 이들 역시 최소한의 우리, 즉 가족을 지킬 뿐인데 그나마 온전한 모양을 갖출 수 없을 것이다.

 2010년 이 땅에 구제역이 번졌을 때 돼지들을 어떻게 생매장했는지 잊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담당 공무원들 중에는 살처분 현장의 기억이 너무 끔찍해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하물며 사람이라면! 얼마 전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6·25 당시 전쟁의 포화에서도 비껴 있었던 경북 경산 지역에서 얼마나 무서운 양민 학살이 벌어졌는지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희생자가 3000명 이상을 헤아리는 구체적인 정황이 너무 끔찍해 차마 형언하기 힘든 반문명적인 참극 그 자체였다. 60여 년 전 그 상처를 어찌할 것인가.

 요즈음 ‘대한민국’이라는 네 음절은 자주 듣는 데 반해 ‘우리나라’라는 단어는 듣기 힘든 것 같다. 그만큼이나 우리의 ‘우리’는 심각하게 해체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든다. 당국이 ‘카톡’을 들여다본다 하여 집단 사이버 망명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지금, 최소한 시위 군중들을 상대로 하는 ‘사진 채증’만이라도 그만두길 권하고 싶다. 그러한 행위는 마치 저 군중이 ‘우리’가 아니라는 선언과도 같으니 말이다. 셔터가 방아쇠 아니기에 망정이지.

정재숙 논설위원 겸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