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출판] '바람과 구름과 비(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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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구름과 비(碑) (전10권)/이병주 지음, 돌녘, 각권 8천5백원

"개화기 때 만약 당대의 지식인.지배층이 동학당과 합세해 '성공한 혁명'을 준비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들이 청국과 일본의 개입을 막고 새 왕조를 건설했다고 가정을 해보자. 나는 이러한 가상 아래 있을 수 있었던 찬란한 왕국의 꿈을 곁들여가며 민족사 전개를 새롭게 생각해 보고 싶었다."

소설가 이병주(1921~92)가 생전에 남겼던 이 말은 발표 25년 만에 재출간된 대하소설 '바람과 구름과 비'를 해독하는 작업에 실마리를 던져준다.

요즘 말로 복거일 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처럼 대체(代替)역사 스타일로 썼다는 얘기다. 멋진 레토릭에 특히 능했던 그가 남긴 다음 말도 들어보자.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

시인 장석주의 설명대로 이병주의 소설은 역사학의 뼈대에 기대되 사람 냄새와 숨결을 되살려내는 작업, 역사 속 패자의 한숨까지도 그려내는 작업이라는 얘기다. 미완성의 대하 소설 '바람과 구름과 비'가 그전형일지 모른다.

김옥균, 민비와 대원군, 서재필 등은 실명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30대의 관상쟁이로 등장하는 최천중을 비롯한 주인공들은 허구의 인물들인데, 이들과 실제인물들이 뒤엉켜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25년 전 신문연재 소설이었던 이 대하소설 스토리는 이렇다. 야심많은 30대 관상쟁이 최천중은 망가져가는 조선조를 대체할 새 이상국가 건설을 꿈꾼다.

그것은 '새 기운을 가진 입헌군주제'로 요약된다. 이 꿈을 위해 그는 천하의 인재들을 모으는 작업부터 벌인다. 무술에 뛰어나거나, 재물을 모으는 재주, 하다못해 거짓말을 잘하는 기술마저 최천중은 높이 산다.

이렇게 해서 아웃사이더들로 구성된 '17인의 재사(才士)'들이 꼬이는데, 스케일 큰 소설가 이병주는 이들 캐릭터를 하나하나 살아있는 인간으로 묘사해내는 데 성공했다는 게 이 소설이 갖는 흡인력이다.

최천중이 그 핵인데, 그는 출세길이 막힌 천출(賤出)에다 '천하의 건달'로 그려진다. 신분사회의 틀을 깨려는 원력을 위해 만들어진 인물로 더없이 적합한 선택이고, 소설 '산하'의 주인공인 노름꾼 이종문에게서 보듯 이병주가 단골로 등장시켜온 타입인 셈이다.

그 이전 왕이 될 인물을 물색하다가 양가집 규수를 겁탈해 자기 아들을 얻는 과정은 이 소설 특유의 이야기적 장치를 말해준다.

갑신정변 등으로 어수선했던 구한말 하나같이 기구함과 박복함 속에 혁명을 꿈꿨던 반골에 다름 아닌 이들의 꿈과 스토리는 그러나 '삼전도장'이라는 이름의 결사(結社)단계 직후까지 그려질 뿐 끝내 완성을 보지 못했다. 아마도 완성됐을 경우 전체 분량이 20권은 넘었으리라 가늠된다.

이병주의 타고난 박람강기(博覽强記)에 홀리듯 읽히는 이 소설을 지금 되읽으며 따져봐야 할 점은 어떤 것일까. 신문기자로 활동 중 나이 44세에 데뷔한 뒤 단행본 80권의 다작을 남긴 이병주의 재주에 경탄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문학의 죽음'이 거론되는 시대에 이병주만한 작가가 드물기 때문에 4반세기 전 옛 작품이 독서시장에 역류해 나온다는 점을 유념해보자.문학성과 대중성이 고루 섞인 이 작품을 읽으며 '우리 시대 큰 소설'을 목 빼고 기다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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