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전략] ‘2등 DJ’를 박정희 대항마로 만든 건 전략적 표심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94호 28면

1970년 9월 29일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에서의 김대중(왼쪽)과 김영삼이 나란히 앉아 있다. [중앙포토]

세상사는 대개 개별 인간들의 전략적 선택의 결과로 진화돼 왔다. 전략이라고 해서 모두 위법과 위선으로 흐르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합리적 선택으로 보는 게 더 현실적인 관점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전제하는 담론 자체를 비난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자기 이익을 전략적으로 추구하는 행위가 공공이익에도 도움이 되도록 하는 제도가 바람직하다. 그런 면에서 전략의 정석이 통하도록 하는 것이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사회를 구현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① 전략적 투표의 힘

지금으로부터 딱 44년 전인 1970년 9월 29일 서울시민회관.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역전극이 벌어졌다. 당시 제1야당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얘기다.

1차 투표에서 김영삼(YS)은 421표를 얻어 김대중(DJ, 382표)에 앞섰지만, 투표자 885명의 과반수 획득엔 실패했다. 82표는 이철승을 포함한 다른 사람을 지지했던 무효표였다. 같은 날 2차 투표가 치러졌는데, 이를 앞두고 이철승 측 대의원들에 대한 양김의 적극적인 지지 호소가 있었다. 특히 DJ가 적극적이었다. 자신을 대통령 후보로 지지해 주면 해줄 약속을 명함에 적어 준, 이른바 명함각서 등 많은 정치적 거래가 그 짧은 시간에 이뤄졌다. 몇 시간 후 실시된 2차 투표에서 총 투표 884표 가운데 DJ는 과반수인 458표를 얻어 410표를 얻은 YS를 눌렀다.

불과 몇 시간만에 대의원들의 지지 성향이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DJ의 기세였을까, 호남의 바람이었을까. 물론 그 날의 역전극을 보다 드라마틱하게 부각시키려면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차선의 후보에 대한 전략적 고려가 작동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다. 즉 2차 투표 당시, DJ가 자신에게 최선의 대안은 아니지만 적어도 YS보다는 나은 대안이라고 판단한 대의원들이 최소한 76명(DJ의 1,2차 득표차)이 있었다는 의미다. 이들이 71년 대통령 선거의 신민당 후보를 결정했다고 보면 된다.

그로부터 17년 뒤이자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7년 전인 87년 9월 29일 서울 남산외교구락부. 이번엔 DJ와 YS가 제13대 대통령 후보 단일화 담판을 했다. 하지만 결렬됐고, 두 사람 모두의 출마는 기정사실화됐다. 실제 둘 다 출마했다.

1987년 9월 29일 외교구락부에서 후보 단일화 담판을 앞두고 악수하는 김영삼(왼쪽)과 김대중.

살얼음판 승부 좌우하는 ‘전략’
87년 대통령 선거의 실제 득표율은 어땠나. 노태우(TW) 36.6%, YS 28.0%, DJ 27.0%였다. DJ, YS 두 후보가 DJ로 단일화해 TW와 겨뤘다면 TW가 당선됐을 것이고, YS로 단일화했다면 TW가 낙선했을 것이라는 여론조사가 있었다. 만일 그 조사가 정확했고 또 DJ가 그 조사 결과를 믿고 YS에게 양보했다면, YS는 단일후보가 되어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수도 있다.

야권 단일후보 DJ가 TW에게 패하는 반면, 단일후보 YS는 TW에게 승리하도록 하는 유권자의 선호도 조합은 여러 가지다. 가장 간단한 조합의 예는 유권자 전체를 각각 3분의 1씩 차지하는 세 후보의 지지집단 D, T, Y의 후보 선호 순서가 다음과 같을 경우다.

D: DJ > YS > TW
(DJ, YS, TW의 순으로 선호)
T: TW > YS > DJ
(TW, YS, DJ의 순으로 선호)
Y: YS > TW > DJ
(YS, TW, DJ의 순으로 선호)

이에 따르면 DJ와 TW의 일대일 대결이 벌어진다면 D만 DJ에게 투표하고 나머지 T와 Y는 TW에게 투표하기 때문에 DJ는 TW에게 패배하게 된다. 반면 YS는 TW와의 대결에서 D와 Y의 지지로 TW에게 승리한다.

<그림>처럼 야권이 먼저 단일화를 추진하고, 이를 국민투표에 의해 결정한다고 가정해 보자. 선호 후보에 따라서만 투표한다면, DJ와 YS 간의 예선에서 유권자 집단 T와 Y는 YS에게 투표하는 반면, 유권자 집단 D는 DJ에게 투표할 것이다. 만일 YS가 예선에서 승리하여 TW와 최종결선을 치르게 되면, 유권자 집단 D와 Y가 YS에게 투표하기 때문에 YS가 최종승자가 된다.

이때 TW는 어떤 전략을 구사할 수 있을까. DJ와 YS 가운데 결선에서 자신에게 질 사람으로 단일화되도록 행동할 수 있다. 즉 TW를 지지하는 유권자 집단인 T는 DJ보다 YS를 더 선호하지만, 야권후보 단일화 투표에서 자신들이 가장 싫어하는 후보인 DJ에게 투표할 수 있다. 그러면 TW가 최종대결에서 야권 단일후보인 DJ를 이기고 당선될 수 있다. 이는 TW가 자신의 천적인 YS를 DJ로 이이제이(以夷制夷)하는 셈이다. 이처럼 자신의 선호대로 단순하게 후보를 선택하지 않고 최종결과를 염두에 두고 투표하는 것을 ‘전략적 투표(또는 전략투표)’라 한다.

그럼 선거가 TW의 의도대로 진행될까. DJ가 결선에 가면 TW에게 패배한다는 사실을 유권자 집단 D도 안다면, D 역시 다르게(전략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D는 야권 후보 단일화 투표에서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DJ에게 투표한다면 결국 자신에게 최악의 후보인 TW의 당선을 초래할 수 있음을 인지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D는 예선에서 최선의 후보 DJ가 아니라 차선의 후보 YS를 지지함으로써 결선에서 YS가 최악의 후보 TW에게 승리하게 만들 수 있다. 이 또한 전략적 투표다. 유권자가 프로라면 D와 Y 모두 YS를 줄곧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DJ와 YS 간의 단일화 투표라는 예비 대결은, 한 수를 미리 내다보면, 결국 DJ 대신 TW 그리고 YS 간의 최종대결인 셈이다. 즉 전략적 국민의 투표에 의한 야권 후보 단일화는 본선에서의 YS 당선이고, 그런 방식을 주장할 측은 바로 YS 진영이다.

물론 87년 당시에는 선거 여론조사가 잘 공개되지 않아 모든 유권자들이 몇 수를 내다보고 투표할 여력이 없었다. 실제 단일화 투표를 하지도 않았다. 유권자들도 자신의 선호나 지지성향에 따라 투표했다. 하지만, 지금은 선거 여론조사 결과가 유권자들에게 속속 알려지고, 또 각 진영에서도 전략적 투표를 독려한다.

여론조사 발달로 전략투표 더 쉬워져
YS가 승리한 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일부 유권자들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는 대신 당선가능한 차선의 후보에게 투표하기도 했다. 이 또한 전략적 투표다.

9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이회창· 이인제 간의 각축이 벌어졌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이회창 측은 “이인제에게 투표하면 김대중이 당선된다”고 강조했고, 이인제 측은 “이인제에게 투표하면 이인제가 당선된다”고 반박했다. 득표율은 DJ 40.3%, 이회창 38.7%, 이인제 19.2%였다. 이회창과 이인제가 얻은 표를 단순 합산하면 DJ의 득표를 웃돈다. DJ가 일대일로 대결해서는 이회창에게 이기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결과였다. 그런 의미에서 97년 대통령 선거는 DJ가 이인제 후보로 이회창 후보를 제압한 이이제이(以李制李)였다고 할 수 있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야권 후보 단일화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박근혜·문재인·안철수의 3자 동시 출마의 경우엔 박근혜가 가장 앞서고 ▶박근혜와 문재인 간의 양자 대결에서도 박근혜가 앞서며 ▶박근혜와 안철수 간의 양자 대결에선 안철수가 앞서고 ▶야권후보 단일화 경쟁의 단순 지지도에선 문재인이 안철수를 앞선다는 여론조사가 있었다.

만일 문재인과 안철수 간의 국민경선이 치러졌다면 어땠을까. 물론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는 유권자가 많았을 것이다. 그와는 달리 안철수보다 문재인이 본선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해서 문재인에게 투표하는 안철수 지지자도 있었을 것이고, 반대로 안철수가 박근혜에게 승리할 후보라고 판단해서 안철수에게 투표하는 문재인 지지자도 있었을 것이다. 또 두 사람 가운데 박근혜에게 패배할 가능성이 큰 후보에게 투표하는 박근혜 지지자도 있었을 것이다. 이 모두 전략적 투표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인식한다면 당선 가능성이 더 큰 차선의 후보에게 투표하는 전략적 투표 행위는 오늘날 민주정치에서 흔히 일어난다. 전략적 투표는 겉으로 2등이나 3등, 심지어 꼴등이던 대안이 1등을 제치고 최종승자가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전략적 투표는 유권자들로부터 강한 호불호(好不好)를 받는 후보 대신에 차선으로 선호되는 후보에게 기회를 주어, 타협을 중시하는 민주정치를 가능하게 만드는 민주적 행위이기도 하다.



김재한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로체스터대 정치학 박사. 2009년 미국 후버연구소 National Fellow, 2010년 교육부 국가석학으로 선정됐다. 정치현상의 수리적 분석에 능하다. 저서로는 『동서양의 신뢰』 『DMZ 평화답사』 등.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