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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 55년, 남진 50년 노래 … 난 20년 불렀으니 애기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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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장사익씨는 스스로 갈고 닦은 ‘흘림체’ 글씨로도 유명하다. 그의 음악적 선배였던 타악기 연주자 김대환씨의 영향을 받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 집, 익살스럽다. 인왕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2층 통유리창에 이런 문구가 붙어있다. ‘날아오지마! 나 무섭다. 새 경고’. 도깨비 형상의 경고장이다. “혹시라도 새가 날아와 창에 부딪히지 않도록 붙여놨슈, 재미있쥬.”

 지난 22일 찾아간 서울 홍지동 북한산 끝자락의 2층 집. 사방이 확 트였다. 살림살이는 단출하다. “밖에 갖고 있는 게 많으니까, 지가 바로 부자지유. 인왕산 바위가 꼭 부처님 같다니까유.”

 이 사람, 소리꾼 장사익(65)이다. 입에 착착 감기는 충청도 사투리로 손님의 긴장감을 단박에 무너뜨린다. 다음 달 30~3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을 시작으로 데뷔 20년 전국 공연을 여는 그다. 가요·국악·재즈 등을 두루 꿴 애절한 목소리로 한국인의 먹먹한 가슴을 달래온 가객이다. 나이 마흔다섯의 때늦은 데뷔였지만 그의 지난 20년은 여느 절창에 못지않은 무게감을 지녀왔다.

 2층 한 귀퉁이에는 이런 문구도 붙어있다. ‘좋은 소리가 항상 살아 있는 내 집. 이곳이 정말 천국이야’. 자기 집을 천국으로 믿고 사는 남자, 이 정도면 몽상가의 과장일까, 아니면 현자의 깨달음일까. 장씨가 차부터 내왔다.

 - 창밖의 큰 바위가 듬직합니다.

 “생긴 지 수억 년은 됐것쥬. 우리는 길어야 백 년 사는디. 눈이 오면 더 좋아유. 온통 크리스마스 카드 같아유. 사계절을 즐기는 거쥬. 테레비도 컴퓨터도 스마트폰도 없이 살아유.”

이 시대 관객들을 위로하는 글을 부탁했더니 5집 앨범에 실린 ‘희망 한 단’의 첫 구절을 골랐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집이 천국이라, 부러운 게 없나요.

 “남사스러워유. 그냥 낙서한 것인디, 꼬깃꼬깃한 종이를 집사람이 펴서 표구를 했구먼유. 이사온 지 13년이 됐는디, 늘 해와 함께 지내니 크게 바랄 건 없슈.”

 - 차를 즐기시나 봅니다.

 “아녀유.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디유. 그냥 폼이에유. 손님이 왔으니까유. 근디 아슈. 차도 좋은 사람과 해야 맛이 나유. 나쁜 사람하고 하면 차에도 취한다니까유.”

 이런 식이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낸다. 꾸미려 들지 않는다. 천체망원경이 있길래 “하늘 구경이 취미인가” 물었더니 “생일선물로 받았는디 어떻게 쓰는지도 몰러유”라며 태연하게 답했다.

 - 벌써 노래 인생 20년입니다.

 “그러게유. 주변에서 ‘한번 해보라’고 해서 객기로 시작했는데, 시간이 이렇게 쌓였네유. 그런데 사실 저는 말도 안 되는 사람이에유. 엊그제 이미자 55년 공연을 다녀왔거든유. 남진도 올해 50년이잖유. 저는 애기쥬, 애기. 다만 제 노래도 이제 청년처럼 키가 커서 꽃을 피우고 향기도 가득하네유.”

 - 공연명이 ‘찔레꽃’입니다. 선생님의 첫 노래죠.

 “20년이면 한 단락을 지은 셈이쥬. 초심(初心)을 생각하려구유. 1994년 11월 서울 신촌의 소극장에 처음 섰을 때 ‘때 묻은 몸 발가벗는다. 감히 내 소리의 옷을 벗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슈. 이젠 목소리 갈라지고 힘도 부치지만 그때 ‘이 세상에 나처럼 행복한 사람 없다’고 했던 건 변함이 없구먼유.”

 - 힘이 부친다고요. 세월 탓이겠죠.

 “왜 약수도 처음엔 좋지만 사람들이 몰리면 대장균이 생기고 물도 마르게 되잖유. 저도 고갈된 게 아닌지, 요즘엔 노래도 안 만들어져유. 예전엔 ‘찔레꽃’ 후렴구에서 ‘울었지’ ‘노래했지’ ‘사랑했지’ 등을 애드리브로 여섯 번 내질렀는디, 요즘에는 세 번 하고 나면 목이 갈라지는 것 같아유.”

 - 지나친 겸손이겠죠. 이번에 신곡은 없나요.

 “8집 앨범 ‘꽃인 듯 눈물인 듯’을 발표해유. 왜 제 노래는 남의 시(詩)를 먹고 들어가잖유. ‘꽃인 듯 눈물인 듯’도 김춘수의 ‘서풍부(西風賦)’에서 따왔슈. 별 의미는 없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이상한 맛이 나는 노래예유. 랩처럼 까불고 놀 겁니다.”

파란 하늘을 등에 지고 앉아 있는 장사익씨. ‘하늘로 가는 길 정말 신나네요’라고 노래했던 그다.

 - 다른 노래는 어떤가요.

 “모두 4곡을 새로 내놓아유. 마종기 시인의 ‘상처’, 목사·시인인 이현주의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에 곡을 입혔고, 2년 전에 불렀지만 녹음은 하지 않았던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도 있슈. 모두 가사가 기가 막혀유.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가는 우리의 모습이 담겨 있슈.”

 장씨가 숨을 고르더니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를 불러 젖혔다(동영상은 joongang.co.kr). “제가 주름살이 워낙 많아유. 대부분 노래를 시작한 뒤에, 그래서 많이 웃어서 생긴 거쥬. 노래하기 전의 사진을 보면 웃는 얼굴이 별로 없어유. 낮과 밤, 하늘과 땅이 바뀐 거랄까, 높든 낮든 노래하고 춤추는 게 인생의 꿈이라면 저는 정말 행운아겠쥬.”

 장씨에게 한 곡조를 더 청했다. 2집 앨범에 실린 ‘기침’이 터져 나왔다. ‘밥그릇의 천 길 낭떠러지 속으로 비굴한 내 한 몸 던져버린 오늘. 삶은 언제나 가시 박힌 손톱의 아픔’이라는 대목이 가슴을 찔렀다. 장사익 노래의 멋과 맛, 그리고 힘이다.

 - 깔리는 듯 폭발하는 목소리는 물려받았나요.

 “고향이 충청도 홍성군 광천이잖유. 어려서 5년간 웅변 연습을 했슈. 고향 뒷산에 올라가 매일 소리를 질렀쥬. 그때 목청이 튼 것 같아유. 제가 판소리를 한 것으로 아는 분이 있는데, 그건 오해예유, 오해.”

 - 그래도 사람들이 소리꾼이라 부릅니다.

 “소리꾼은 명창에게나 붙여주는 이름이에유. 제겐 턱도 없지만 영광일 뿐이쥬. 외국에서는 성악가도 가수라고 하지 않나유. 저도 그냥 노래하는 사람이쥬.”

 - 평소 목청은 어떻게 가다듬습니까.

 “매일 1시간 정도 풀어유. 그렇게 안 하면 소리도 도망을 가유.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테이프를 틀고 40분 정도 따라 해유. 파바로티는 ‘하이C’ ‘높은 도’의 제왕이쥬. 성악가들은 ‘하이C’가 안 되면 거꾸러진다고 하잖유. 남은 시간엔 경기명창 전태용 선생의 ‘창부타령’을 부르구유.”

 - 노래하기 전 직업이 다양했습니다.

 “고교(선린상고)를 졸업하고 보험회사 직원, 독서실 운영, 카센터 심부름 등 열댓 개 이상 전전했쥬. 깨지고 넘어지고 엉망진창이었쥬. 정말 밥이 절실했슈. 이래선 안 되겠다, 그래서 한 3년 태평소에 전념하자며 사물놀이패에 들어갔는디 노래로 자리를 잡게 됐네유. 운명, 팔자라고 생각해유.”

 - 팔자 타령은 좀 고루한데요.

 “어머님이 점을 봤는디, 제가 전생에 기생이었대유. 전 ‘일어날 기(起)’에 ‘날 생(生)’자로 풀어유. 주변을 신나게 하는 거쥬. 또 누가 종교를 물으면 ‘미신’이라고 대답해유. ‘아름다울 미(美)’에 ‘믿을 신(信)’, 절도 교회도 아름다운 건 다 믿어유. 제 이름도 ‘생각 사(思)’에 ‘날개 익(翼)’, 즉 ‘꿈꾸는 날개’ 아닌가유. 현실은 힘들더라도 희망과 행복을 노래하는 광대 이름으로 딱이쥬.”

 - 그런 광대가 평소 술 한잔 못하다니요.

 “얼라! 술을 먹으면 하체가 흔들리고 목구멍이 떨리는디유? 하고 싶은 음악이 안 되는디유? 음악도 맑은 정신으로 보여줘야 해유. 겉과 속이 같아야 한다니까유.”

 - 남은 소망이 있다면요.

 “뭐가 있겄슈. 지금처럼 가늘고 길게 사는 거쥬. 사람들이 슬퍼할 때 슬픔을 덜어주고, 기뻐할 때 기쁨을 키워주는 노래를 부르는 거쥬. 그것만한 행복이 세상에 또 있겄슈.”

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S BOX]배호·이미자·패티김·조용필·윤복희 노래 좋아하는 까닭

장사익씨는 자칭 ‘유행가를 부르는 하찮은 사람’이다. 대중가요와 국악 중 어느 게 본인 음악의 밑바탕이 됐느냐고 물었더니 주저하지 않고 유행가를 꼽았다. 국악적 요소는 그 다음이라는 말이다. 1967년 선린상고를 나온 그는 이후 3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서울 낙원상가 주변 한동훈음악학원에서 가요의 기본기를 닦았다. 남진·나훈아 등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시절이었다. 장씨에게 부탁했다. 평소 그가 좋아하는 ‘기막힌 가수들’에 대한 촌평을 해달라고….

 ▶배호 ①=‘돌아가는 삼각지’를 들어봐라. 흔들흔들 갈대처럼 노래한다. 목구멍에 힘을 빼고 던지는 소리가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다. 한국인에게 어울리는 음색이다.

 ▶이미자 ②=트로트를 하면서도 꺾는 게 없다. 목소리를 모아 곱게 굴린다. 세 시간을 노래해도 목이 쉬지 않는다. ‘동백아가씨’는 한국의 땅과 하늘이 모여서 만들어진 노래다.

 ▶패티김=칸초네의 여왕이라고 한다. 목소리의 오리지낼러티(Originality·독창성)가 있다. 우리나라를 초월한, 세계에 통하는 국제적 가수다. 어마어마한 무대 장악력은 또 어떻고.

 ▶조용필 ③=노래의 맥을 안다. 힘줄 때 힘을 주고, 올라갈 때 소리를 모으고 등등. 음성 자체의 매력이 대단하다. 사람들이 ‘옐로 보이스(Yellow Voice)’라고 하지 않나. 섹시하다.

 ▶윤복희=어렸을 적에 가장 좋아했다. 노래의 맛이라고 할까, 융통성 있게 모든 노래를 소화한다. 선생님답게 노래를 한다. 음색이나 노래 형태, 다 좋아했다. 매우 흥미로웠다.

[박정호의 사람 풍경] 데뷔 20년 공연하는 소리꾼 장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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