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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왜 죽음을 얘기해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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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버리 묘지에서 바라본 맨해튼의 스카이라인. 뉴욕 JFK국제공항에서 맨해튼으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양 옆에는 넓은 캘버리 묘지가 있다. 미국뿐 아니라 다른 많은 나라에는 이처럼 묘지가 사람들의 일상 생활 공간 안에 들어와 있다. 자연스럽게 죽음을 생각하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셈이다. [사진 게티 이미지]

웰다잉(well-dying). 죽음은 한동안 언급조차 금기시된 일종의 터부였다. 그런데 2012년 11월 번역 출간된 셸리 케이건 예일대 철학과 교수의 『죽음이란 무엇인가』가 교보문고 인문분야 베스트셀러 9주 연속 1위를 차지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듯 어느 순간 죽음이나 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우리 사회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2000년대 초·중반만 해도 화두는 단연 웰빙(well-being)이었다. 모두들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살까에만 관심을 기울였는데 느닷없이 ‘잘 죽어가기’라니-. 왜 웰다잉에 주목하게 된 걸까. 아니, 그보다 먼저, 이렇게 죽음을 꼭 이야기해야만 하는 걸까.

어떻게 죽을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해 한국 사회가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건 2009년이다. 세브란스병원에서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던 ‘김 할머니’ 가족이 연명치료 중단을 요구하면서 불거진 존엄사 허용 논란 끝에 법원은 결국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인정했고, 그해 김수환 추기경은 “인위적인 치료를 하지 말라”며 사실상 존엄사를 택해 웰다잉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바꿔놓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 죽음에 대한 논의는 과연 얼마나 더 깊어졌을까.

 죽음을 외면하다

죽음에 대한 관심은 분명 높아졌다. 학문의 영역에서 생사학 연구가 보다 활발해졌고, 얄팍한 이벤트라는 비판도 일부 있지만 유서 쓰고 관 속에 들어가보는 임종체험도 꽤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죽음은 여전히 우리 삶에서 너무 멀다. 아니, 애써 죽음을 무시한다. 죽음을 아예 잊고 살아간다는 말이다. 정진홍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죽기 싫어하고, 그래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2009년 한 연구(김명숙 충남대 철학과 강사,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 관한 철학적 고찰’)에 따르면 한국인이 죽음을 떠올리는 순간은 크게 두 가지였다. 다른 이의 죽음을 접했을 때나, 내가 힘들고 아플 때다.<그래픽 참조> 김명숙 강사는 “죽음에서 한발짝 떨어져 있고 싶은 무의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해석했다.

16~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해골과 모래시계 등을 그려 ‘세속적 삶은 짧고 덧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이른바 ‘바니타스 정물화’를 집에 걸어두는 게 유행이었다. 아드리안 판 위트레흐트(1599~1652)의 해골과 꽃다발이 있는 바니타스 정물.

사실 한국만 그런 게 아니다. 셸리 케이건 예일대 철학과 교수는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사람들 대부분 죽음을 나쁜 걸로 여기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본능적으로 외면하고자 한다”고 했다. ‘누구나 죽는다’라는 말조차 사람들은 사실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죽음을 믿지 않는다니 대체 무슨 말일까. 그는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예로 든다. 이반 일리치가 부상 끝에 죽음에 직면하고서야 그는 비로소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른다. 의식적 차원에서는 스스로가 죽을 운명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무의식적 차원에서는 불멸성을 믿고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죽음을 피하는 거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도 “요즘은 웰다잉 여행까지 한다지만 대부분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경향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한림대 생사학연구소 박사과정 박훈(28·춘천)씨는 “죽음을 공부한다고 하면 친구들은 모두 ‘왜 그런 공부를 하느냐’거나 ‘우리 나이에 왜 필요하냐’고 묻는다”고 했다. 특히 연령이 높을수록 죽음에 대한 대화를 더욱 꺼린다. 한국 자원봉사·호스피스 분야의 대모라 할 수 있는 김옥라(96)씨가 이사장으로 있는 각당복지재단에서 죽음교육을 받은 이성아(30·우면동)씨는 “죽으면 수목장을 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부모님이 ‘재수없게 왜 죽는 이야기를 하느냐’며 노여워했다”고 했다. 암 수술 세 번 끝에 완치 판정을 받은 웰다잉연극단장 최명환(66·신천동)씨도 “다들 죽음을 불결하고 부정적으로 본다”며 “내가 죽음교육 받은 데 이어 관련 연극활동을 한다 하니 긍정적으로 보기보다 오히려 염세적으로 빠진 게 아니냐는 식으로 걱정스럽게 보더라”고 했다.

죽음에 소외되다

언제부터 우리는 죽음을 이렇게 멀리하게 된 걸까. 학자들은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조선시대 제문(祭文)·묘비문 등을 연구한 최기숙 연세대 국학연구원 HK(인문한국)교수는 “조선시대엔 환갑이면 장수를 축원하는 수서(壽序)를 썼다”며 “수서는 단지 오래 산 것을 축하한 게 아니라 어떻게 나이를 먹어야 잘 늙은 건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죽음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죽음에 대한 사유가 줄면서 삶에 대한 가치기준이 빈곤해졌다”고 덧붙였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니, 더 이상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지를 이야기하지 않고, 돈 많이 벌어 성공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는 거다.

굳이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우리 삶이 죽음과 좀 더 가까웠다는 걸 알 수 있다. 자기가 묻힐 묘 자리를 보고, 수의를 직접 만들고, 이를 옆에 두고 살았던 게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사자의 서(死者의 書, Book of the Dead)는 고대 이집트 관 속의 미라와 함께 매장한 사후세계(死後世界) 안내서이다.

최준식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한국학 교수는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임종은 자기 집에서 가족에 둘러싸여 맞았다”며 “지금은 임종은 병원에서 의료진 결정에 따르고 장례는 장례식장에서 상조회사가 맡다보니 정작 당사자와 가족은 소외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6·25 전후까지 흔했던 유아 사망이 의료기술 발달로 확 준 것도 죽음과 멀어진 한 요인으로 본다. 자녀, 혹은 형제자매의 죽음은 죽음을 일상의 일부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주는데, 이제는 그런 죽음을 경험할 기회가 적다는 얘기다.

강원남 웰다잉 플래너는 “요즘엔 집안 어른이 돌아가셔도 자녀를 장례식장에 데려가기는커녕 ‘그 시간에 차라리 공부나 하라’고 할 정도로 아이들에게 죽음을 보여주거나 말하기를 꺼린다”고 말했다.

클림트의 1916년작 ‘삶과 죽음’. 이렇듯 삶과 죽음은 공존하는데, 사람들은 눈을 감은채 애써 죽음(해골)과 눈을 맞추지 않는다.

죽음과 멀리 떨어지다

죽음을 애써 외면하고 피하려는 경향은 어느 나라든 비슷하다. 하지만 죽음과의 거리엔 분명 차이가 있다.

우선 한국에선 죽음이 저 멀리 있다. 심리적인 거리뿐 아니라 물리적인 거리도 마찬가지다. 자연스럽게 죽음을 떠올릴 수 있는 환경이 차단돼 있다. 명절이나 기일(忌日)이면 제사를 지내고 저 멀리 산소에 다녀온다. 하지만 이건 삶 속에 있는 게 아니다. 화장터나 납골당이 들어설 때면 늘 반대여론이 거센 것만 봐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2007년 노원구 태릉초와 공릉중 인근에 납골당이 들어선다고 하자 일부 학부모가 교육환경에 좋지 않다며 등교 거부까지 해 결국 건립이 취소된 게 대표적인 예다.

현존하는 가장 비싼 작가 데미안 허스트의 가장 비싼 작품 ‘신의 사랑을 위하여’. 해골에 백금 틀을 씌우고 다이아몬드 8601개를 박아 만들었다.

외국은 전혀 다르다. 도심 속에 묘지가 있어 일상생활에서 죽음과 가깝게 지낸다. 유럽 등에선 인근 주민이 산책하는 공원이자 관광객의 필수 관광코스이기까지 하다. 홍콩 역시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고 교통량이 많은 도로 바로 옆에 대규모 묘지가 자리잡고 있다. 호주인과 결혼해 호주 멜버른에 사는 유모(32)씨는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굉장한 부자동네가 있는데 그 한가운데 묘지가 있더라”며 “묘지를 부정적으로 보기는커녕 매일 묘지를 보면서 죽음이 삶의 일부분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재영 서강대 종교학 교수는 “죽음을 어릴 때부터 배우면 삶의 과정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어 온전한 인격체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부모는 죽음에서 떼어놓았다고 생각하겠지만 거꾸로 우리 아이들은 폭력적 게임이나 결과만 중시하는 지나친 경쟁을 통해 남을 죽이는 문화에 익숙해 있다”고 말했다.

루이지 루솔로의 1909년 작 ‘자화상’. 밀라노 시립근대미술관에 있는 이 그림 속 화가의 표정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엿볼 수 있다.

죽음을 교육하다

외국은 이처럼 삶 속에 죽음이 스며들어 있을 뿐 아니라 학교에서 죽음교육까지 시킨다. 미국은 1963년 미네소타 대학에서 죽음교육 과정이 처음으로 개설된 뒤 죽음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고, 초·중·고에서도 죽음교육을 한다. 한국죽음학회 초청으로 2006년 방한했던 죽음학의 대부인 알폰소 데켄 신부는 당시 강연에서 “독일은 고교 과정에 죽음교육이 포함돼 있고 죽음 관련 교과서만 20개가 넘는다”고 했다. 일본은 2002년부터 학교 공식 교육과정에 죽음교육을 채택했고, 영국도 지난해 전국 550개 초등학교에서 죽음을 교육과정에 포함시켰다.

한국은 죽음학을 개설한 대학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딸과 아내를 연이어 먼저 저세상에 보낸 후 웰다잉 강사를 하고 있는 최철주 전 중앙일보 편집국장이 쓴 『이별서약』에는 세 살 딸을 뇌종양으로 잃은 정은주 교사 얘기가 나온다. 정 교사는 ‘죽음교육을 해야 삶이 튼튼해진다’는 믿음이 있지만 한국 공교육은 이를 인정하지 않기에 그는 어렵게 한 대안학교에서 관련 수업을 하고 있을 뿐이다. 강원남 웰다잉 플래너도 “중·고교에서 죽음교육을 통해 자살예방교육을 하겠다고 하면 부모들이 싫어한다”고 말했다.

죽음교육 강사들이 추천한 온 가족이 함께 보면 좋을 영화들. 위로부터 할리우드 영화 ‘로렌조 오일’과 일본 영화 ‘엔딩 노트’‘걸어도 걸어도’포스터.

최준식 교수는 “요즘은 성교육이 중요하다면서 유치원 때부터 시키는데 성교육보다 훨씬 더 중요한 죽음교육에 대해선 무관심하다”고 했다. 근대사회로 넘어오기 이전엔 성(性)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하면서 죽음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이야기했지만 이젠 정반대가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보문고가 각각 ‘성교육’과 ‘죽음’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 성교육 관련 서적은 아동용 136종, 유아용 48종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죽음과 관련해서는 아동용 52동, 유아용 4종뿐이었다.

죽음 관련 책이 적은 건 그만큼 부모들이 자녀에게 죽음에 대해 굳이 말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처럼 죽음을 가르칠 필요가 과연 있는 걸까. 죽음학 전문가들은 “그렇다”고 입을 모은다. 실용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아무리 죽음을 보여주지 않으려 애써도 뜻하지 않게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애완동물의 죽음이 대표적이다. 아이들에게는 사람만이 아니라 애완동물의 죽음 역시 큰 충격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적절한 교육을 받았다면 보다 일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삶 속의 죽음 죽음 속의 삶

자, 그렇다면 우리는 왜 죽음을 말하며 죽는다는 것을 인식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케이건 교수를 한번 더 인용하자면 죽음을 통해 삶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케이건 교수는 “자신이 죽을 거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인생의 우선 순위를 바꾸고 비로소 생존경쟁의 쳇바퀴 속에서 벗어나고자 한다”고 했다. 이는 죽음학 전문가들의 공통된 말이기도 하다. 오진탁 한림대 생사학연구소장의 “죽음을 이해하는 건 곧 삶을 바꾸는 것”이라는 말처럼 말이다.

애플 창업자인 고(故) 스티브 잡스가 이를 잘 보여준다. 10대 시절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는 그는 2005년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17살 때부터 난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만약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하려던 것을 할 것인가’라고 묻는다”며 “아니라고 대답하는 날이 많아질수록 변화가 필요함을 깨닫는다”고 말했다.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늘 도움이 됐다는 얘기다. 노자와 장자 철학을 연구하는 서강대 최진석 철학과 교수도 매일 아침 명상을 하며 ‘나는 곧 죽는다’는 생각을 한다고 한다. 그는 “죽음을 의식할 때와 안 할 때는 다르다”며 “죽음을 의식하면 덜 옹색해지고, 덜 게을러지고, 더 진실해진다”고 했다.

그래서 정진홍 교수는 “삶의 자리에서 죽음을 바라보지 말고 죽음의 자리에서 삶을 바라보고 살라”고 조언한다. 그래야 내 삶을 더 낫게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최준식 교수도 “삶이 깊어지기 위해선 죽음을 공부해야 한다”며 “도망다니다 도둑맞듯이 죽음과 맞닥뜨리지 말고 젊을 때부터 공부하라”고 권했다.

왜 젊어서 하라는 걸까. 최준식 교수는 “늙으면 죽음에 대해 더 진지하게 숙고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로 오히려 피하고 부정하려 한다”고 했다. 죽음교육 전문강사인 아나운서 출신 유경(54)씨도 “죽음을 생각하는 건 현재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삶의 중간점검”이라며 “당장 죽음을 앞둔 사람이 아니라 젊고 건강한 사람에게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자는 삶과 죽음이 함께 붙어 있다는 생각에 자유를 얻었다고 한다. 자유를 얻기 위해 지금부터 죽음을 공부하는 건 어떨까.

안혜리·심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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