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의 가늘기만 한 선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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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이눔들(우리들에게 외국사람들은 어디까지나 「놈」이다. 왜놈·미국놈·노서아놈)인간들이 가늘단 말야!』어느 크리스머스 때던가 내 동료는 동네 영국 친구한테서 받은 선물 얘기를 끄집어내면서 이렇게 넋두릴 하고 있었다. 들어보니 그런 소리가 나오기도 되긴 됐다.
이쪽에선 자그마치 조니워커, 그것도 검정딱지 붙은걸 꼽배기로 선사해 논 처지다. 그런데 그쪽에서 보내온 걸 뜯어보니까 코딱지만한 일기 수첩 하나 하고 마른행주 한 장, 값으로 따져 보자하니 여기 돈 1원하고 50전이 넘질 못한다.
아무리 그게 공짜로 얻은 술이었고 또 그 선물엔 『너희나라에서 당분간 신세지게 됐다』는 뜻도 있었긴 했었지만 이쪽에서 그의 말마따나「태하게 군것」에 비하면 1원50전은 너무 가늘었다. 딴 「놈」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놓고 대접을 했다.
그런데 그 답으로 먹으러 오라는 게 감자 한덩어리에 고기부스러기 한 접시가 뭐냐. 그「마카나기」녀석한테 돈을 꾼 처지가 아니었던들 술만 먹고 나왔을 거라고 동료는 가느다란 영국 친구들을 나무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이 다 그렇다. 선물 하나, 대접 한번 허벅지게 하는 거 별로 못 봤다.
이 얘길 서울서 온 양반에게 하니까 그는 무릎을 치면서 이러고 있었다- 『역시, 그것 봐, 사람들이 규모있게 산다는 얘기 아냐! 그런거 배워야 한다구」 똑같은 얘길 영국 친구한테 하니까 그 또한 『역시!』하면서『한국이란 그래서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하는 걸거야』라고 좀 엉뚱한 소리를 들고 나온다.
옷 장사로 서울에 자주 왕래하는 그의 말로는 하다못해 우정 같은 데서까지 발휘되는 한국 사람들의 맹렬성(자, 잔 좀 돌리라구!)이야말로 우러러보고 두려워할 만한 민족으로서의 자산이라는 것이다.
양쪽에 」이들은 있다. 또, 이런 까닭이 있기도 하다고 여겨도 본다. 영국 사람들은 서로 부담감(조니워커는 큰 부담이다)을 안주고 산다. 따로따로 하고 혼자 살자는 자세다. 우리는 그와 반대다. 보다 공생적이다. 서로 기대기도 하고, 얽히고 설키고, 부담감도 주고(상다리를 부러뜨린다고 왜 나쁘냐)… 적어도 지금까진 그랬다.
민족성의 차이다. 그걸 굳이 굵다, 가늘다, 좋다, 나쁘다 할건 없다.
내가 왜 이런 소릴 꺼내고 있나? 아, 그건 오늘아침 신문에서 본 광고 때문이었다. 『먼저 읽고 난 다음에 선물로도 쓸 수 있게 X머스 선물책은 지금 사시오!』또, 「혹시」하고 은근히 기대감을 갖게 하는 이런 금속 공구상 것도 있었다-『여성들이여, 즐거운 계절을 앞두고 남편에게 새 연장을 선물하시오!』<박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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