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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이젠 흡연권도 요구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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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양선희
논설위원

평화주의자인 내가 거의 독립운동하듯 집요하게 투쟁했던 것이 혐연권(嫌煙權)이었다. 1990년대 초, 처음 들어온 편집국은 ‘오소리굴’이라 불릴 만큼 흡연의 자유를 만끽했고, 그게 마치 편집국의 낭만인 양 찬양되기도 했다. 이런 판국에 갓 입사한, 시쳇말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신참 기자가 담배를 피우는 선배들에게 “담배 냄새가 싫다. 내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인간에 대한 무례이며 양심 없는 짓”이라고 꼬박꼬박 항의했다. 또 당시 ‘산소 소주’라는 제품이 나왔는데, 신문 광고가 산소마스크를 쓴 사람을 배경으로 ‘산소를 달라’는 카피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광고를 대량 확보해 편집국 벽마다 붙이고 다녔다. 누군가 뜯어내면 다시 붙이기를 극성스럽게 반복했다. 혐연에 관한 한 비타협적이고 악명이 높았다.

 이런 터이니 어떠한 금연정책에도 지지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 이번 담뱃값 인상도 맞는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나라 담뱃값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7000원에 한참 못 미치고, 성인 남성 흡연율(44%)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또 흡연으로 인한 질병으로 한 해 5만8000명이 생명을 잃는다는 조사가 있다. 전문가들은 “담뱃값은 단번에 큰 폭으로 올려야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 흡연자들의 반발과 국회에서의 일부 비토에도 불구하고 2000원 인상이 무리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시기도 됐고, 명분도 있다.

 한데 민생 관련 정책의 문제는 방향보다 ‘디테일’에서 성패와 선악이 판가름 난다. 담뱃값 인상은 1000만 흡연인구와 관련된 문제이니 광의의 민생문제다. 이런 문제는 명분과 공감대 확산을 통해 불만을 누르고, 추진력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지독한 혐연가인 나조차 지금 돌아가는 형국엔 의구심이 든다. 의도에 대한 의심과 절차의 무례함 때문이다.

 보건복지부는 담뱃값 인상을 ‘국민건강증진을 위해’라고 이유를 밝혔다. 그런데 오비이락(烏飛梨落)인지 주민세·자동차세 등의 인상안이 잇따라 발표되면서 이 역시 ‘복지증세’의 방편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담배세도 지방세다. 그러니 무상보육·기초연금 부담이 늘어난 지방자치단체들이 디폴트 우려까지 하는 마당에 복지재원 마련을 위해 흡연가들의 등을 친다는 거다.

 복지부는 늘어나는 재원을 흡연자들의 건강증진과 복지 향상, 금연확산을 위해 어떻게 활용할지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않았다. 금연을 하려면 각종 요법과 치료에 평생 담뱃값 이상의 비용이 든다. 저소득층이 더 담배를 못 끊는 건 이 같은 비용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데 그동안 담배세수 중 건강증진기금으로 할당된 몫에서도 금연 지원은 243억원(1.12%)에 불과하다. 담배세로 지금도 한 해 6조8000억원을 걷고 있지만 흡연공간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않아 공원과 거리가 온통 흡연인구로 붐비고, 비흡연자도 길거리 간접흡연으로 고통받는다. 담배 관련 복지는 아예 없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12일 입법예고된 담뱃값 인상 관련 법안은 마감일이 15일이었다. 나흘이다. 40일 이상 하도록 돼 있는 입법예고기간을 이렇게 싹둑 잘라먹은 것은 아예 의견을 받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어째서 국민에게 이렇게 무례한가.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담배회사가 중독 위험성을 알리지 않았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내는 등 범사회적으로 담배를 몰아붙인다. 한데 담배는 80년대 중반까지 전매사업이었다. 흡연자의 지갑에 빨대를 꽂고 각종 재원을 마련하며 흡연천국을 만든 건 국가였다. 지금도 지자체의 복지재원 마련을 위해 흡연자들의 지갑을 털려고 한다. 가격을 올려도 흡연자는 담배를 살 거다. 담배 피우는 죄로 ‘봉’ 노릇을 해야 한다. 내 경우도 혐연권 투쟁은 쉽지 않았다. 이젠 세금 내는 흡연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건강권과 쾌적한 흡연권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요구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돈 걷어가는 정부가 알아서 해주지는 않을 것 같다.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