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국내여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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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1주일에 걸친 국제가정학회 총회가 끝나자 나는 패션본고장을 찾아보려는 앞으로의 여정을 위해 짐을 줄이는 일부터 착수했다.
첫번 해외여행이었던 만큼 경험부족과 과잉흥분으로 필요이상 장만해온 옷들을 싸서 서울로 부쳐버린 것이다.
함께 총회에 참석했던 이정원·이정자·이동혜선생들과 덴버에서 해어진 필자는 우선 캘리포니아주 라하브라시로 향했다.
라하브라에는 우연한 기회에 우리 가족과 친구가 된 미국청년 「아더·스튼」이 부모님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튼」씨 부처는 필자를 위해 큰 파티를 열어주었는데 라하브라지방신문의 기자들도 초대된 바람에 뜻아니한 취재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 당시 미국인들은 대부분 한국이라면 방금 전쟁을 겪은 폐허의 나라요, 형편없는 후진국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한국에서 온 의상디자이너이며 직업상의 안목을 넓히기 위해 구미를 여행중이라니까 모두들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고
나는 파티복으로 한복을 차려입고 따로 마련해간 남녀용 한복을 펴보이며 한국을 보다 잘 알리기에 내 온갖 지식을 다 기울였다. 「스튼」씨도 남자 한복을 직접 입어 보이며 그가 군인으로 한국에 머물면서 보고들은 것들을 설명하는 등 필자의 서툰 민간외교를 열심히 거들어 주었다.
이날의 일은 1960년7월13일자 라하브라스타지 가정란 한 페이지를 독차지할 만큼 대서특필되었다. 『한국의 수석 패션 디자이너 「스튼」가를 방문』이란 표제아래 우리 한복에 대한 자세한 절명과 필자의 디자이너로서의 활동과 여행목적, 서울 명동을 중심한 한국의 패션계 현황 등 강세하기 이를데 없는 기사가 커다란 사진과 함께 실린 것이다.
지금도 가끔 그 당시의 신문스크랩을 들춰 볼 때면 동양에서 온 낯선 여인을 위해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은 「스튼」씨 가족에게 큰 감사의 정을 느낀다.
라하브라에서의 열흘 가까운 체류를 끝낸 필자는 세계적으로 가정학의 명문으로 손꼽히는 드렉슬대학이 있는 필라델피아로 갔다.
조카(시누 신애균씨 자제)인 현봉학(의학박사)과 구내외의 안내로 박물관에 가서 모나코 왕비가 된「그레이스·켈리」의 웨딩가운을 구경한 것도 필라델피아에서의 일. 그러나 필라델피아에서 있었던 일 중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은 드렉슬대학 교수의 소개로 당시 미국의 유명 디자이너 「비즈」씨를 만난 일이다.
「비즈」씨는 친절히 그의 작업장과 작품들을 소개해 주었는데 그가 만든 옷에는 놀랄만큼 비싼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웬만한 드레스는 보통 7백달러였고 개중에는 9백50달러나 하는 드레스도 있었다.
정찰표에 표시된 원단값의 10배 가까운 가격에 어리둥절해하는 필자에게 「비즈」씨는 그 가격이 결코 비싼 것이 아니라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만한 돈올 내고 고급 옷을 사가는 여자들은 대부분 성적이 까다롭게 마련이예요. 옷이 짧다거나 길다거나 혹은 넓다거나 좁다는 이유로 몇번씩 새로 산 옷을 고쳐가지요. 그런 요구를 일일이 들어주는데 보통 한달 이상이 걸려요 「그동안에 내 인생은 늙어가지요.
그러면서 그녀는 복식업으로 돈을 벌려면 손님 비위맞추느라 고생만하는 주문복 대신 기성복을 하라고 간곡히 충고해주었다.
이러한 「비즈」씨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조언은 그때까지 별로 관심이 없던 기성복에 관심을 갖게했고 뒷날(1963년 3월). 필자가 국내 최초로 기성복 쇼를 열고 기성복센터를 개점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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