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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백성호의 현문우답

과학의 빅뱅, 종교의 빅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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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백성호 기자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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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태초에 빅뱅이 있었습니다. 엄청난 대폭발이 있었고, 그로 인해 세상에 온갖 원소와 물질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이 또 숱하게 충돌하며 화학적 결합을 거듭한 끝에 별이 탄생했습니다. 그 별끼리 충돌하고, 부서지고, 다시 뭉치며 지구가 생겼습니다. 다시 엄청난 시간이 흘러서 생명이 나왔습니다. 그 생명이 진화를 거듭한 끝에 인간이 등장했습니다. 여기에 약 138억 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 끝자락에 여러분과 제가 이렇게 숨을 쉬며 서 있습니다. 이게 우주의 역사입니다.

 빅뱅은 과학자들의 출발선입니다. 빅뱅에서 모든 게 뿜어져 나왔고, 그로 인해 이 거대한 우주가 펼쳐졌으니까요. 과학자들을 만나면 저는 가끔 묻습니다. “그럼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나요?” 과학자들은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만약 ‘빅뱅 이전’이라는 게 있다면, 우주의 출발선을 빅뱅에서 거기로 옮겨야 한다. 거기가 출발선이니까. 과학은 증명할 수 있는 대상만 다룬다. 어쩌면 ‘빅뱅 이전’은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종교의 영역이다”라고 답합니다. 먼 훗날 과학이 더 발전하면 ‘빅뱅 이전’도 과학의 대상이 되겠죠.

 과학과 달리 명상과 종교에는 ‘빅뱅 이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그걸 ‘말씀(Logos)’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에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천지창조로 인해 만물과 우주가 생겨나기 전에 ‘말씀’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빅뱅 이전은 ‘말씀’입니다.

 불교에도 ‘빅뱅 이전’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다름 아닌 공(空)입니다. 공에서 온갖 물질과 형상과 사유가 튀어나옵니다. 그런 물질과 형상과 사유가 바로 색(色)입니다. 공이 색으로 나오는 걸 ‘창조’라 부르고, 색이 공으로 들어가는 걸 ‘파괴’라 부릅니다. 물질은 물론 주위의 빛까지도 몽땅 빨아들이는 게 ‘블랙홀’입니다. 색이 공으로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그 반대도 있습니다. ‘화이트홀’입니다. 공에서 색이 창조되는 통로입니다. 과학에서 화이트홀은 아직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가설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때로는 명상이나 종교의 통찰이 과학을 앞지를 때도 있습니다. 어쩌면 ‘빅뱅 이전’과 ‘빅뱅 이후’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과학은 그 둘을 시간적 일직선상에 놓습니다. 그런 방식을 통해선 ‘빅뱅 이전’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과학은 빅뱅을 첫 출발점으로 보니까요. ‘빅뱅 이전’이 있다면 출발선을 더 앞으로 당겨야 한다고 보죠.

 저는 인간이 하나씩의 별이고, 우리의 일상이 작은 우주라고 봅니다. 거기에는 블랙홀도 있고, 화이트홀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아무 감정도 없었는데 갑자기 짜증이 확 올라옵니다. 창조입니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자 짜증이 싹 사라집니다. 파괴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화이트홀과 블랙홀을 통해 창조와 파괴는 지금도 쉼 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빅뱅 이전’과 ‘빅뱅 이후’를 오가는 겁니다. 그런데 블랙홀 따로, 화이트홀 따로가 아닙니다. 둘은 하나의 홀입니다. 들어올 때는 블랙홀, 나갈 때는 화이트홀이 될 뿐입니다.

 ‘빅뱅 이전’과 ‘빅뱅 이후’도 그런 관계입니다. 도화지 위에 연필로 그림을 그려보세요. 빅뱅 이후에 펼쳐진 우주처럼 말입니다. 별도 그리고, 달도 그리고, 나무도 그려보세요. 우리 눈에는 별과 달과 나무만 보입니다. 다시 유심히 들여다보세요. 그 별과 달과 나무 속에는 도화지가 가득 차 있습니다. ‘빅뱅 이전’도 그런 겁니다. 바닥이 없는 도화지 같은 겁니다. 그래서 ‘빅뱅 이후’ 속에 ‘빅뱅 이전’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만 알아도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태초의 거대한 평화가 내 안에 이미 가득 차 있음을 깨닫게 되니까요.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