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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신공황후의 신라정 아대설은 날조|국수적인 사가들이 조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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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민족이 해방 된지 이미 36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그 어처구니없는 일본전설의 여인인 신공황후 라는 이름을 들춰야 한다는 것이 몹시 서글프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 밑에서 국민학교 과정만 마쳤다면 누구나 그 이름을 익히도록 되어 있는 이 「수수깨끼의 여인」이 우호를 다짐하는 한일외상 회담에서 일본외상의 입을 통해 태연스럽게 튀어 나왔다니 일본인의 의식구조는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인지 궁금하다.
문제의 신공황후 라는 여인은 일본인이 그들의 고대사를 엮는데 기본 사과로 삼고있는『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실물이 많은 나라」인 신라를 덮쳐 종국으로 삼았다고 그 공이 높이 적혀 있는 까닭이다.
젊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본서기』에 기술된 이 여인의 업적에 관한 부분을 요약해보겠다.
『일본서기』 권팔의 「중애기」 권구의 「신공황후섭정전기」라는 것을 보면 신라계의 천일회(아마노히보꼬)의 딸로 일본 제14대 중애의 후가 된 조공은 구주지방의 미개족 「웅능」을 치기 위해 그곳에 갔다가 보물국인 신라를 치라는 신화를 받는데 그것을 주저한 중애왕은 신벌을 받아 죽었다한다. 신공황후는 신탁을 지켜 무내숙편 (다께우찌노스꾸네)을 총 참모로 삼아 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그 힘을 얻어 신라를 정벌하여 영원히 종국이 되겠다는 다짐을 받아 많은 책물을 가지고 개선했다는 줄거리로 엮어져 있다.
『일본서기』에 적혀 있는 그들의 건국은 기원전 660년으로 되어 있으나 제10대 숭신(기원전 97∼3O년)까지는 가공적 인물인 것은 일본에서도 일치된 견해이며 99년이나 통치했다는 제11대 수인의 존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신공의 아들인 제16대 응신왕(270∼310년)부터가 실존인물이 아닌가 보는 학자도 많다.
신공이 섭정했다는 연대를 『일본서기』에서 따져 본다면 서기 200∼268년이 되어 신라의 나해왕·조공왕·첨해왕을 거쳐 미추왕초까지의 연대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기록에는 신라가 일본에 군사적으로 점령되어 그 종국이 된 기사는 찾아 볼수 없을 뿐 아니라 사학연구에서 동시대자료가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 철칙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일본에서도 고대사연구에는 『고사기』 나 『일본서기』 보다 더 소중히 다뤄지고 있는 『삼국지』 『위지』 의 「왜인전」에도 눈을 닦고 보아도 그런 기사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3세기 후반에 엮어진 『위지』「왜인전」을 보면 당시까지도 일본열도는 수십국이 병립하는 상태였다. 그 중에서 여왕 비미호가 도읍지로 하고있는 사마대국의 여왕국이 가장 유력하였던 것으로 적혀있으나 일본의 학계에서는 아직 비미호의 정체와 사마대국이 구주냐 나량·대판지방인 기내냐하는 문제로 피나는 논쟁이 벌어져 있는 형편이다.
당시 이러한 상태에 있던 왜가 신라까지 원정할 국력을 지녔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3세기에는 아직 일본이라는 실체가 없었던 것이며 「천황」 이라는 칭호도 7세기가 되어서 외교문서와 금석문에 보이게 된다는 극히 간단한 사실만 알아도 「신공황후」 전설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일본의 고대사에 관한 문헌은 한반도에서의 추화인이 지니고 있던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대화정권의 재정·정치권을 한손에 쥐고 성덕태자와 모의하여 숭준천황을 시해하고 추고녀황(592∼628년)을 옹립한 것으로 알려진 백제계의 소아씨가 몰락할 때 거의 불타 없어졌으나 문헌의 수난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나량지방을 기반으로 한 귀화한인의 세력을 피하여 평안경(현경도)으로 수도를 옮긴 항무제(781∼805년)에 이르러서는 나머지 한반도 관계의 기록을 불살라 버렸던 것이다. 서기 720년에 엮어진 『일본서기』를 다시 손질하여 지금과 같은 것으로 엮었던 것도 이 항무대였다.
이와 같은 사실만 보아도 『고사기』나 『일본사기』에 적혀있는 「신공황후」 전설이 황당한 것이며 이웃나라사람의 주체성과 자존심을 짓밟고 그 위에 값싼 만족감을 누리려는 야비한 자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18세기초부터 일본에서 일어난 국학파로 불리는 복고주의파의 출발점이 8세기에 엮어진 『고사기』 와 『일본사기』의 연구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와 같은 허황된 전설을 그대로 믿고있는 그들의 한국사상은 한국을 태고부터 일본에 복종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그들의 비뚤어진 한국사상은 19세기 중엽부터 보이게되는 그들의 이른바 「정한론」의 논거가 되고 그 후 다시 한국의 병탄을 합리화하는 이른바 「일선동조론」 「일한일역론」등 엉뚱한 괴론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이 「신공황후」 전설은 한국학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본학계에서도 1924년 진전좌우 길에 의해 검토되어 그 허황성이 논파되고 그 후 지내핑 같은 학자에 의해서도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기는 『백제기』를 얼버무려 엮은 것이며 『백제기』를 빼고 나면 하나도 남지 않는다고 신공황후기 그 자체조차 의심을 가진바있었다.
『백제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도리는 없으나 지내는 이 발설이 황통에 대한 불경으로 몰려 한때 헌병대에 끌려가기도 했던 일이 있었다. 현대 인문과학 분야에서는 아시아에서 가장선진국으로 알려진 일본에서도 「신공황후」의 망령이 20세기 전반까지는 그들의 머리 속에 깊이 파고 들어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 한 예가 1945년까지의 일본은행권이 그 액면에 따라 등원겸족· 화기청마· 관원도진 등 그들의 역사에서 황실을 도운 총신들의 초상을 다양하게 찍어 발행했던 사실이다. 그런데도 조선은행권만은 일원권에서 백원권까지 모두 신공황후의 총 참모로서 신라를 정복했다는 그 무내숙양의 상상화를 그린 초상만을 새겨 발행해 왔다는 것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지폐를 통해 신공의 망령을 믿도록 하며 그들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광적인 흉모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전후 일본천황의 지위가 신에서 인간으로 복귀하는 혜법이 마련된 후 일본의 국사교육이 뿌리째 바꾸어졌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의 그들의 국학파들이 지녔던 이그러진 한국사상의 전설만은 그대로 이어져 여러면에서 문제가 많은 「광개토대왕비」같은 것을 이상하게 해석하면서까지 「신공황후」의 망령을 그대로 지키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허구도 제일사학자 이진희, 국내사학자 천관우의 비문조작설, 그리고 북쪽의 사학자 김석형의 「일본내 삼한분국설」등으로 깨어진바 있다.
세상에는 웃지 못할 일도 많다. 경상도 일대에서는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어떤 상표에 생각만해도 지긋지긋한 그 무내숙보의 초상화가 찍혀 10여년이나 시장에서 가정으로 흘러 넘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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