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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불꽃감지기, 점검비용까지 떠넘기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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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룡
김회룡 기자 중앙일보 차장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이서준
사회부문 기자

‘K사가 불량 불꽃감지기를 유통시킨 것을 확인했습니다. 의뢰 시험으로 성능을 확인해 안전을 확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울 성동구의 한 빌딩 관리인 김모씨가 지난달 말 관할 소방서로부터 전달받은 한국소방산업기술원(원장 문성준)의 공문 내용이다. 공문을 자세히 들여다본 김씨는 현기증을 느꼈다. ‘수수료: 46만5950원(부가세 별도)’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감지기에 부착된 기술원의 검정필증을 믿고 설치한 것 아닙니까. 점검비용까지 소비자에게 떠넘기는 게 말이 됩니까.”

 김씨는 관할 소방서에 불꽃감지기 교체비용에 관해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잘 모르겠다”였다. 김씨는 “9월 말까지 교체를 하라고 하는데 비용(개당 200만~300만원)이 만만치 않아서 결정을 못 내리고 있다”며 “피해자가 모든 부담을 떠안으라니 어이가 없다”고 했다.

 이번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은 제조업체인 K사에 있지만 한국소방산업기술원의 책임도 그에 못지않다. 기술원은 국내 유일의 국가공인 소방제품 검정기관이다. 기술원의 승인과 검정 없이는 소방제품 제조·판매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기술원은 K사의 불법 행위를 잡아낼 수 있는 기회를 번번이 놓쳤다. K사가 2012년 리모컨 조작으로 검정을 통과하려다 적발됐지만 검정을 담당하는 기술원 경보장치부는 한 개 제품의 승인만 취소하고 넘어갔다.

 K사는 검정 통과 후 판매할 때는 내용물을 불량 제품으로 바꾸는 속칭 ‘속갈이’ 수법을 썼으나 기술원은 이를 걸러내지 못했다. 사전 검정만 꼼수로 통과하면 그만이었던 셈이다. 수사 결과가 나오기 전 기자는 기술원 측에 검정 과정에 문제가 없었는지 물었다. 당시 기술원 담당자는 “불량 제품을 사전 단계부터 걸러내 시장 유통을 원천 차단하는 검정 방식”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경찰 수사 결과 K사의 불량 불꽃감지기가 2006년부터 숭례문과 원전 등 2587곳에 2만3152개 설치된 사실이 확인됐다. 2만여 개의 불량 제품엔 예외 없이 기술원의 검정필증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수사 결과를 지켜보자던 기술원은 피해자들에게 ‘점검비용 46만원’을 통보한 것 외엔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 등 선진국처럼 사후관리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 방재업체 대표는 “미국에선 사전검정이 거의 없는 대신 검정기관이 시중에 파는 제품을 임의로 구입해 검사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소방제품에 대한 내구연한도 없다. 설치한 뒤로는 화재가 일어날 때까지 10년 넘게 방치되곤 한다. 정부는 불량 불꽃감지기 유통을 방치해온 불량 검정시스템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이서준 사회부문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