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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선「관광명소」동독엔「철의 장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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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베를린장벽 생긴지 20년…동서독서 기념행사>
1961년8월13일 새벽. 동독병사들과 경찰들은 갑작스레 베를린 시내 중심가를 가로질러 철조망을 둘러치기 시작했다. 1주일후 철조망은 3m높이의 흰색 콘크리트 벽으로 대체됐다.
이렇게 해서 냉전의 상징으로 군림하게된 베를린 장벽은 13일로써 20주년을 맞이 하지만 그 장벽은 날로 두꺼워지고 정교한 장치를 덧붙이고 있다.
1백76km의 장벽에 5백여m마다 높게 선 감시탑, 그리고 사람이 살지 않는 완충지대 (동독령 베를린)의 설정과 지뢰밭의 부설, 그 완충지역에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금속그물의 설치, 그것도 못미더워 독일산의 몸집 큰 셰퍼드 2백60마리의 방사-. 동독측은 장벽건설에만 무려 66억달러를 들였다.
동독영토안에 절해고도처럼 갇혀있는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수많은 동독인들을 막기위한 고육지책으로 동독이 고안한 이「동서냉전의 사생아」가 탄생한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양독이 다같이 요란한 행사를 벌이고 있다.
서로가 자기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대대적 행사는 또 한차례 분단의 비극을 실감케 한다. 그 행사를 주관하는 방식도 두개의 체재의 차이를 느끼게 해준다.
서독은 13일『장벽으로 모여라』라는 이색 시위를 통해 동독의 인권탄압정책을 전세계에 알릴 계획이다. 프랑크푸르트의 국제인권위원회가 주최하는 이 시위는 서독의 자유시민들이 1만대의 자동차로 서독본토와 서베를린의 찰리검문소를 잇는「자유의 회랑」통로(동독내륙)를 돌파하는 대행진을 갖는다.
이 동진시위는 동독과는 달리 시민의 자유참가로 이루어질 뿐 아니라 서독본토와 서베를린간의 동독영토를 주파하면서 동독의 인권탄압정책을 규탄할 예정이다.
동독은 이 장벽설치 20주년을 공식 경축하기로 되어있다. 이미 동독언론들은 잇달아「장벽구축의 불가피성」을 강조해왔고「호네커」동독공산당 제1서기는 장벽구축을「자유수호를 위한 부산물」(동독 ADN통신)이라는 주장으로 둘러댔다.
동베를린거리에는 한때 독일제국의 상징이었던 브란덴부르크문을 민병대가 경비하고 있는 사진을 게재한 벽보가 나붙어 있고, 그 벽보엔『1961년8월13일-우리의 안보를 위하여』라는 구호가 적혀있다.「호네커」의 주장이나 벽보의 구호는 베를린 장벽탄생 이전의 상황을 살필 때 동독의 입장으로서는 그럴듯하게 들린다.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탈출한 난민은 59년에 14만명, 60년에 19만명으로 늘어났고, 61년 초부터 장벽이 생긴 그해 8월13일까지는 14만여명이었다. 노동력의 부족사태를 맞고있던 동독으로서는 이 장벽의 구축으로 유능한 인재의 탈출을 막을 수 있었다.
지난 20년동안 이 장벽을 넘으려다 사살된 동독인들은 70여명이나 되었고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아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의 수는 연간 5백여명 수준으로 장벽이 없음으로 해서 일어났을 숫자에 비해서는 많이 줄기는 했다.
서독이나 서방여행자에게 요즈음 동베를린 출입에는 별 불편은 없다. 큰행사가 있을 경우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으로 넘나드는 1일 여행자가 50여만명을 웃돌고 서베를린에 취업중인 동독주민 또는 동베를린시민이 현재 6만여명에 이른다. 또 서베를린 및 동독의 여행자가 연간 1천여만명의 규모다.
이런 측면에서 한 서독관리는『장벽은 사실상 무너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베를린 시민들에겐 이 장벽은 너무나 높다. 장벽을 쌓기 이전에는 동베를린 시민들이 자유롭게 서베를린을 넘나들면서 동독에서는 구하기 힘든 생필품들을 쉽게 구했지만 지금은 텔레비전 방송의 광고에서만 볼 수가 있다.
동베를린 여인들은 서베를린백화점들의 개점시간과 판매가격까지 훤히 알고있지만 갈수 없는 안타까움 때문에 애태우고 있다.
베를린 장벽구축이후 동쪽에서 서베를린으로 장벽을 넘어 탈출해 온 사람은 많았고 일반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반면 지금까지 서베를린 시민이 베를린장벽을 넘어간 사람은 한 사람 뿐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지난 3월 27세의 한 서독청년이 관광관측탑의 한 벽을 기어넘어 동베를린쪽으로 뛰어넘었다. 정신이상자로 보이는 이 청년은 동독초병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돌진하다 무차별 사격을 받고 현장에서 쓰러져 곧 동독군인들에 의해 끌려갔다. 서베를린시 당국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동독측은 지금까지 그의 생사조차 알려주지 않고 있다.
베를린장벽은『자본주의의 침투를 방지하는 사회주의의 보루』(동독정부)로 건설되었지만 서베를린측으로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대단한 관광자원이기도 하다. 총에 맞아죽은 탈출자들을 추모하는 나무십자가 그림엽서로부터 베를린·찰리검문소라는 글이 새겨진 셔츠에 이르기까지 각종 관광기념품들이 날개 돋친듯 팔리고 있다.
1백76km에 달하는 베를린장벽은 20년이 흘렀지만 쉽게 허물어질 것 같지 않다.<본=이근량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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