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믿을 수 있는 사회를 이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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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 의 채 <신부·가톨릭대학 교수>
삶의 우렁찬 고동소리가 방방곡곡에서 들려온다. 또 화려한 행사와 장밋빛 약속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펼쳐지며 우리의 가슴을 뿌듯하게 하기도 한다.
우리는 최근 몇 해 동안의 크고 작은 충격적 사건들을 용케도 잘 극복했고 새로운 탄생을 위한 구각을 깨는 진통을 일단 마무리했다.
19세기말부터 한반도는 열강들의 격심한 물리적 힘의 각축장이 됐고 이에 대한 선혈의 민족저항으로 점철돼왔다.
감격의 8·15해방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끝내 물리적 힘을 배경으로 한 외세의 제물이 된 채 남북으로 두 동강이 나는 한을 남겼다.
왜 우리는 해방후 한 세대를 지나면서도 정신과 양심의 승리가 지배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한번 제대로 실현하지 못 했던가. 정말로 한없이 후회 스럽고 부끄러울 뿐이다.
이 같은 근대사의 한 시점을 지나고있는 우리는 이제 지금까지 휘말려온 역사의 탁류를 정화하고 밝은 미래를 지향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지성인들이나 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한층 더 절실하다 지성과 종교가 만나야 할 문제들은 정치·경제·언론·학원 등 도처에 산적해있다.
근본적인 것에 대한 은폐나 속임수가 있다면 여타 것들에 대해서 만의 진실과 솔직히 통할 리 없으며 상호신뢰가 바탕이 되는 건전한 사회가 이루어질리 만무하다. 이 나라의 지성들 특히 종교인들은 권력과 금력의 남용에 의한 비인간화를 막고 본연의 인간상으로 회복시켜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지고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에 대한 참으로 훌륭한 귀감이 있다. 사형선고를 내리려는「빌라도」총독의 끈질긴 질문들에 묵묵부답으로 끝내 일관하던 그리스도는『나는 오직 진리를 위해 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습니다』라고 의연하게 대답하고 죽어가지 않았던가.
역시 진리의 빚은 박해 중에서도 사람의 의식을 변혁시키는 힙을 갖는다. 요즈음 흔히 제창되고 있는 정의구현은 물질의 공정한 분배차원을 넘는 깊은 뿌리를 갖고있다.
정의의 개념은 인간의 근본에 귀착하는 진리와 관련한다는 점을 위정자나 국민 모두가 깊이 유의해야 할 것이다.
또 근자에 이르러 일부 대학생들의 의식문제, 좌경화 경향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6·25의 경험이 없는 세태들에게 공산사상의 금기 일변도나 전 세대들의 체험담 정도로 문제가 해결될리 만무하다.
지식욕이 왕성한 대학인들에겐 미지의 사상에 대한 호기심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대학지성에 걸 맞는 공산사상에 대한 이론적 강의와 합리적 비관이 있어야 할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공산주의를 극복하는 지름길은 역시 민주주의의 실현인 것이다. 또 하나는 젊은 세대, 젊은 지성들과 같이 생각하고 같이 말하고 공감할 수 있는 진정한 신뢰의 정신풍토 조성이 시급하다. 있어야할 모습의 인간상을 성취시킬 지혜와 용기를 우리는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이 기회에 스치고라도 지나고 싶은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흔히들 이 땅에서의 근본문제는 진정한 철학의 부재현상이라고 한다. 우리의 교육풍토에서 과연 생각하는 인간창출의 원천인 철학이 얼마나한 비중을 차지하는지, 올바르고 깊이 있게 생각하는 터전이 없는 사상부모지대에 가치전도와 혼란이 연속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유럽선진국들의 유서 깊은 대학들은 예외 없이 먼저 신학과 철학교육으로 사상적 바탕을 다졌고 차차 오늘의 알찬 대학들로 발전했다.
인간은 좌절하면서도 계속 희망을 산출하는 존재이기에 또한 번의 희망을 건다. 이 해가 다할 무렵에는 최근 몇 해를 보내면서 느꼈던 것과 같은 회한이 없는 한 해를 보낼 수 있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1926년 평북 정주태생 ▲그레고리안대(로마)·콜럼비아대·뮌헨대 수학 ▲부산 서대신동 성당 신부 ▲저서『형이상학』『중세철학사』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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