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재판의 참극보고 경찰에 투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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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내가 20대롤 접어들던 때의 우리나라의 기류는 매우 어지럽고 불안정한 것이었다. 분열과 상잔이 소용돌이치는 회색의 상황 속에서 젊은이들은 방황하고 있었다. 좌와 우, 정통과 변혁등 대립과 갈등 속에서 나의 젊음도 전전반측의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거창한 물결은 이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휩쓸고 가버렸다. 전쟁이라는 엄청난 사실 앞에서 나는 나의 고민이, 젊음의 방황이 얼마나 부질없고 사치스러운 것이었던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동족상잔이라는 비극의 실체에 몸서리를 느낀 것은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잿더미로 만든 전화 그 자체에 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6·25직후,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뀐 서울의 명륜동거리에서 내가 우연히 목격하게된 인민재판의 광경에서다. 하얀 헝겊으로 눈가리개를 하여 묶어 세운 소위 반동분자 앞에서 어떤 대학생들의 젊은이가 증오에 불타는 목소리로그의 무시무시한 죄상에 대한논고를 선동적으로 외쳤다. 군중속에서「사형이요!」「옳소!」하는 함성과 합께 박수소리가 와르르 터져 나왔다.
『저 사람이 이번에 형무소에서 나온 그 집 아들이래.』
대학생들의 그 젊은이를 가리키며 아낙네들이 수군거렸다. 차마 처형의 광경까지는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 나는 눈앞이 캄캄해질 이만큼 격앙되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걸었다. 이념이나 시비를 초월하는 원초적인 분노와 슬픔과 아픔 때문에 며칠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서울이 수복되자 나는 이내경찰관이 되었다. 물론 나의 필생의 직업으로 택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조국을 위해 젊은이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군이나 경찰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오늘까지 내가 경찰인으로 자족해 온 까닭은 물론 나의 어쩔 수 없는 생애의 숙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보다도 더 큰 까닭은 6·25때 내가 목격했던 인민재판의 광경과, 다시는 이땅에 그와 같은 비극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내 나름의 안간힘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옮을 것도 같다.
어려운 여건아래 고생하는 후배들에게도 이 같은 사명감 없이는 같은 길을 걸을 수 없음을 일러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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