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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명함도 자식 짐도 내려놓으니 … 잊었던 '나' 를 찾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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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김인권(60)씨는 보험 대리점 대표에서 시를 쓰는 대학생이 됐다. 김씨는 “하고 싶은 일을 하니 하루가 마냥 즐겁다”고 말한다.

부산광역시 김인권(60)씨는 동아대 국어국문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늦깎이 대학생이다. 그는 평생 보험일(대리점 운영)을 하면서 틈틈이 시를 썼다. 젊은 시절 가정형편이 어려워 동아대를 중퇴한 뒤에도 시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했다. 2005년 한 문예지의 신인문학상을 받았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건강에 탈이 났다. 2010년 위암 3기 판정을 받고 수술했다. 김씨는 “수술 후 인생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그의 간절한 희망, 그건 정식으로 문학을 배우는 일이었다. 2011년 동아대 국문학과 야간부에 지원했지만 낙방했다. 재수 끝에 2012학번으로 대학생이 됐다. 그는 “시험이 어렵긴 하지만 배우는 게 너무 재미있다”며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런 고민에 허비할 시간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6074(60~74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꿈은 문학과 예술이다. 어렸을 때는 문학청년, 문학소녀의 꿈을 꾸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다. 밤새 소설을 읽으며 펑펑 울고, 좋아하는 시를 줄줄 외우며 홀로 감정의 심연에 빠져들었다. 눈 위에 숯으로 그림을 그리며 꿈을 꿨지만 팍팍한 생활 속에서 꿈을 묻고 살았다.

 대학 갈 여건이 안 되는 경우 평생교육원을 활용한다. 제주도 농부 김보균(66)씨는 젊은 시절부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농사일이 바빠서 잊고 살았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제주대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교실에서 2년간 글쓰기를 공부했다. 3년 전 결실을 봤다. ‘비 오는 날의 사색’이란 수필로 등단했다. 김씨는 “젊은 시절부터 글 쓸 기회가 있으면 ‘진짜 내 글’을 쓰고 싶었다”며 “밭에서 일하는 동안 영감이 떠오르면 노트를 꺼내 메모한다”고 말했다.

김종화(65)씨는 육군 중령 예편 후 서울 강서 폴리텍대학에 다니고 있다. 김씨는 “나이 들어서 젊은 사람 못지않게 산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중령으로 예편한 김종화(65·서울 송파구)씨는 올 3월 서울 강서 폴리텍대학 출판·편집 디자인 과정(1년)에 들어갔다. 그는 “지금까지 에세이·소설 등을 꾸준히 써왔다”며 “내가 쓴 글을 남의 손을 거치지 않고 직접 디자인하고 일러스트까지 해보고 싶어서 이 과정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황종연씨는 “현재 노인들은 경제개발 과정에서 숨 가쁜 생존투쟁을 하면서 교양에 대한 욕구를 충족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문학이란 형식이 비용이 적게 들고, 훈련받지 않거나 사회적으로 지체가 높지 않은 사람도 표현할 수 있어 노인의 자기 표현 수단으로 활용하기 쉽다”고 말했다.

 예술 분야 6074는 여성이 많은 편이다. 닥종이 작가 김영희(70)씨는 “내가 인생의 진정한 자유를 느낀 것은 예순을 넘긴 어느 날 잠자리에서였다”고 썼다. 2년 전 펴낸 책 『엄마를 졸업하다』에서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키우느라 여념이 없는 생활인에게 예술에 대한 열정은 ‘사치’일 수 있다. 하지만 예술가로서의 삶을 시작한 6074들은 “회사의 명함을 벗고, 부모라는 이름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나니 예술이 다시 내게로 왔다”고 말한다.

 제주도 토박이 고수선(60·여)씨는 방송통신고를 마치고 2010년 제주대 의류학과에 진학해 올 2월 졸업했다. 어릴 때 고등학교에 가려 하자 집안에서 “물질이나 하지 뭣 하려고 고등학교냐”며 반대해 중학교만 마친 게 한이었다. 평소 바느질에는 자신이 있어 의류학과를 선택했다. 도서관에서 숱하게 밤샘하며 입시 준비에 매달린 끝에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MT·공모전에 동급생들과 함께 참여했다. 고씨는 “미팅 빼고 다 해봤다”고 말한다. 4년의 공부는 꿈을 살려냈다. 그는 요즘 수의(壽衣) 사업을 구상 중이다. 고씨는 “내 머릿속에 있는 걸 그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권기홍(74·여)씨는 전업주부에서 손뜨개 인형 작가가 됐다. 권씨는 “유럽 사람들이 내 개인전을 보고 유럽 오면 싸이처럼 인기 끌 것이라고 했다”며 자랑했다.

 학교에 들어가야만 예술의 꽃을 피울 수 있는 건 아니다. 권기홍(74·여·경기도 성남시)씨는 손재주가 남다르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40여 년을 전업주부로 살았다. 70세가 되던 해, 교회 인형교실에서 손뜨개 인형을 처음 접했다. 권씨는 처음 인형 한 쌍을 떴을 때 젊은 시절의 열정이 떠올랐다고 한다. 지금까지 네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권씨는 “내년에 유럽에서 개인전을 열어 싸이처럼 돌풍을 일으키려 한다”고 말했다.

조병곤(63)씨는 개인사업을 하다 은퇴 후 공방을 열었다. 조씨는 “일과 놀이의 경계를 없애려 했는데 그 꿈이 실현됐다”고 말한다.

 예술은 굳이 남에게 배우지 않아도 즐길 수 있다. 조병곤(63·서울 용산구)씨는 60세가 되던 해 작은 공방 하나를 열었다. 하루 8시간씩 이곳에서 십자가 형태의 조형물을 만든다. 판매가 주목적은 아니다. 30년 넘게 회사원으로, 사업가로 살아왔다. 전문적으로 일을 배우진 않았지만 머릿속에 있는 걸 정리해서 만든다. 조씨는 “일과 놀이의 경계가 허물어진 삶을 살고 싶다는 게 오랜 꿈이었다”며 “이제야 평생 뒤돌아볼 때 가장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대한노인회 이심 회장은 “부모가 시켜서 또는 가족 부양을 위해 자신과 잘 맞지 않은 직업을 선택한 경우가 있다”며 “전직 법관이 꽃을 가꾸고 시를 쓰고, 교육 종사자가 은퇴 후 사회복지사가 되려는 경우가 있는데 정부가 배움의 길을 터 주는 걸 조금만 도와주면 제2의 인생이 열린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성식 선임기자, 박현영·장주영·김혜미 기자, 김호정(중앙대 광고홍보학과)·이하은(서울여대 국어국문학과) 인턴기자
사진=신인섭·송봉근·김성룡 기자 welfar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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