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기의 反 금병매] (3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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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매실차 맛이 그만이구려. 신맛도 제대로 나고. "

서문경은 뜨거운 매실차를 마시면서 무대 집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무얼 그리 뚫어지게 쳐다보시오?"

왕노파가 시치미를 떼고 서문경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는 척하였다.

"아, 저 집 뜰 매화나무가 아름다워서 말이오. 나뭇가지가 어쩌면 저렇게 우아하게 뻗어 있을까. 그림 그리는 재주가 있으면 고스란히 화폭에다 담고 싶소. "

"매화나무가 아름다운 것은 매화나무 주인이 아름답기 때문이겠지요?"

왕노파가 말을 슬쩍 돌리며 서문경의 눈치를 살폈다. 서문경이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

"봄이 되어서 그런지 마음이 왠지 허전하구려. 아마도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기 때문에 그럴 거요. "

"아이구, 어르신도.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후덕하신 마나님이 계시고, 그것도 모자라 아리따운 애첩들이 어르신을 모시고 있는데. 기생 중의 기생으로 이름이 나 있던 이교아와 탁이저도 어르신을 모시고 있잖아요. 그런데도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어 허전하다니요?"

"그건 내 마음을 모르는 소리요. 첫째 마누라 죽고 후처로 들어온 아내는 그야말로 양반 규수로서 단정하기 이를 데 없지요. 잠자리 할 때도 신음소리 한번 안 내고 목석처럼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해요. 여자로서 교태가 전혀 없단 말이오. 그런 여자랑 잠자리 하는 재미가 뭐 있겠소? 그리고 이교아와 탁이저 같은 여자는 얼굴 하나는 반반하지만 이미 무수한 남자들을 거쳐 닳고 닳은 여자들이란 말이오. 지금은 왜 그런 여자들을 데리고 왔나 후회가 돼요. 홍수가 지면 마실 물이 없다고, 집안에 여자가 많으나 정작 마음에 드는 여자는 없단 말이오. "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는 것이 아니라 속궁합이 맞는 여자가 없다는 뜻이 아닌가요?"

"할멈, 그 말이 그 말 아니오? 이교아와 탁이저도 처음에는 속궁합이 기가 막히게 맞는 여자라고 여겨져서 데리고 왔는데 자꾸 잠자리를 해보니 그게 아니더란 말이오. 뭐라 그럴까, 헐렁한 느낌 있지 않소? 남자들을 거친 그만큼 헐렁해졌다는 느낌 말이오. "

"에구, 망측해라. 이 늙은이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으셔. 그래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해서 어쩌시겠다는 건가요?"

"뭘 어쩌겠다고 하는 소리는 아니오. 그저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요. 나무에는 물이 오르고 꽃들은 피어나고 새들은 우짖는데 나를 흡족케 해줄 여자는 어디에 있나, 이런 심정이라는 거지요. "

"그 말은 바로 나에게 중매를 부탁하는 말이 아니고 뭐예요? 솔직하게 말해 보세요. 어르신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줄 여자 하나 중매해달라는 거지요? 하지만 내가 그랬다가는 마나님한테 혼이 나고 말 거예요. "

"할멈도 못 하는 소리가 없네. "

서문경이 매실차를 후르르 급히 마신 후 의자에서 일어나 달아나듯 찻집을 떠나갔다.

이 모든 광경을 금련은 발 틈으로 여전히 훔쳐보고 있었다. 서문경이 찻집을 떠난 것을 보고 그제서야 금련이 발을 걷어올려 대나무 장대로 받쳐놓았다.

봄바람이 매화나무 꽃잎들을 몇 개 떨어뜨리더니 방안으로 따스하게 밀려들었다. 금련은 봄바람에 부드럽게 애무를 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저절로 조금씩 숨이 가빠졌다.

그때 문득 서문경 같은 남자의 품에 안겨본다면 다른 소원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물론 무송의 품을 그리워해본 적도 있지만 무송은 금련을 거부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서문경은 금련이 조금만 손을 내밀면 언제라도 그 품에 안길 수 있는 남자가 아닌가.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한낮이 지나 무대가 돌아올 무렵, 서문경이 다시 왕노파의 찻집에 나타났다. 오늘 하루만 해도 서문경이 세 차례나 찻집을 찾아온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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