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3)제73화 증권시장(5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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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동양통신시절>
헌병·특무대·경찰 등으로 계엄 업무를 수행해야 했던 원용덕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은 경찰출신 헌병소령인 노덕술씨(당시 국방부근무)로 하여금 계엄사 중요임무를 맡게 했다.
노 소령은 장택상씨가 수도청장일 때 수사과장을 지낸 친분으로 계엄사령관보다는 장씨 (당시 국회의원)말을 더 잘 들을 것으로 필자는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노소령은 병을 칭하고 출근하지 앉았다.
원용덕 계엄사령관은 노소령의 임무를 대신케할 양으로 대구의 김창용 특무대장을 부산으로 불러 내렸다.
그려나 노소령은 집으로 찾아온 김창룡 특무대장에게 다음날부터 출근하겠다고 말했다 .
이때 정국은씨가 부산에 나타나 양우정씨 집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김 특무대장은 정국은씨의 체포를 상신 했으나 원 계엄사령관은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라고 하여 허가하지 않았다.
정국은씨는 평북출신으로 양정고보를 나온 후 신의주의 압갑일보 기자로 들어갔다.
그후 그를 잘본 당시 평북경찰부장 강구웅씨가 경기도경찰부장으로 영전돼가면서 일본 조일신문사에 추천해주어 서울 특파원으로 활동하다 해방을 맞았다.
후일 밝혀졌지만 해방이 되자 정씨는 한국이 적화되어 공산국가가 되는 줄 예측하고 남노당에 가입했다. 국제신문 등을 경영하다가 남한 조직책이던 김삼룡과 접선한 것이 발각되자 양우정씨의 연합신문 주일 특파원으로 동경으로 갔다.
김창룡 특무대장이 김포공항으로 수사관을 보냈으나 30분 차로 놓치고 말았다.
그후 6·25가 발발하자 유엔종군기자로 활동하다 모종 사건으로 동경에서 부산으로 돌아와 양사장을 막후에서 도와주고 있었다.
그후 「일제시대 경성부윤 고시진의 서울 밀입국」이란 고시진 사건을 동양통신에 발표하여 장택상 총리가 물러나는 개기를 만들기도 했다
여하튼 필자는 동양통신전무가 된 후 정국은씨를 동양통신과 연합신문의 편집국장으로 천거했다.
그러자 양 사장은 「김창룡 특무대장의 양해」를 조건으로 내세웠다. 대구에 있던 김 특무대장을 만나니 그도 또 조건을 달았다. 정국은씨가 과거의 일을 사실대로 기록하여 가져오면 양해하겠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다음날 부산으로 내려가 양사장에게 보고하고 정씨를 양사 편집국장에 임명했다.
나는 몇 차례 김특무대장과 정국장의 만남을 주선했으나 그때마다 길이 엇갈렸다.
얼마 후 신문용지를 구입하기 위해 일본을 다녀온 날 밤으로 기억된다.
밤12시가 다되어 부산 범일동 나의 집으로 정국장이 헐레벌떡 찾아왔다. 원용덕헌병사령관으로부터 급히 상경하라는 연락이 왔다는 전갈이었다
다음날 아침 출근하니 양 사장에게도 갈홍기 공보실장으로부터 같은 내용의 전보가 와있었다.
마산에서 급히 돌아온 양사장과 함께 그 날밤 미군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튿날 새벽 서울역에 도착한 우리는 각각 갈 실장 집과 원장군 집을 향해 헤어졌다. 신당동 원장군 집에 도착하니 원 장군은 반공포로석방 발표관계로 방송국에 가고 없었다. 아침을 먹고 부관 지 소령을 통해 약속한대로 아침 10시에 경무대로 갔다.
원 장군과 마주 앉았다. 대뜸 하는 얘기가 정국장을 일본특파원으로 내보내라는 것이었고 양우정씨는 민족분열 자」로 낙인이 찍혀 있다는 것이었다.
정 국장을 일본으로 내보내라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양씨에게 민족분열자란 낙인이 찍혔다는 말은, 이해가 가지 앓았다.
원 장군의 설명은 이러했다. 양씨가 외국통신기자와 회견하면서 북진을 반대한다고 한말이 외국방송에 보도되고 그 소식을 「프란체스카」여사를 통해 전해들은 이 대통령이 대노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큰일이 일어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정국장을 김창룡특무대장이 잡으려는 것은 짐작이 가도 양씨를 민족분열 자로 몬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원 장군에게 이 박사가 양 사장을 민족분열 자로 생각하는 것은 자주 만나는 기회가 없어서 그런 것이니 양 사장을 입각이라도 시켜서 자주 접촉토록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그러자 원 장군은 『당신은 추천할 수 있어도 양씨는 절대로 안된다』며 정 국장이나 빨리 일본특파원으로 보내라고 했다.
서상권 법무장관과 신태영 국방장관이 정국은씨의 체포 재가를 받으려고 경무대에 들어 갔으나 반공포로석방계획으로 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경무대를 뒤로하며 곰곰 생각해봐도 납득이 되지를 않았다. 양씨는 외국신문기자와 회견한 일이 전혀 없으며 자유당을 같이 만들고 부산에서 그렇게 신임했던 사람을 하루아침에 민족분열자로 낙인을 찍다니 분명 오해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었다.
오후에 갈 실장을 만나고 돌아오는 양 사장의 안색도 좋을리가 없었다.
내가 원장군한테서 들은 얘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양사장을 위로해주기 위해 통신사 기자재를 구입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이나 가보자고 권했다.
정국장도 찬의를 표했다. 그는 김 특무대장이 자기를 체포하려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도일 하려 했으나 비자가 나오지 않아 은근히 양 사장의 일본에서의 막후역할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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