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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황순원문학상 본심 후보작 ⑨ 소설 - 천운영 '다른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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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천운영은 “단편소설은 칼을 한 번 휘둘러 인생의 단면을 예리하게 보여주는 맛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천씨의 단편들이 강렬한 느낌을 주는 이유다. “외국 작가 중 장편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쓴 트루먼 커포티를 특히 좋아한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소설가 천운영(43)의 작품은 어떤 기대를 품게 한다. 2000년 등단작인 단편 ‘바늘’을 비롯한 초기 작품의 강렬함 때문일 게다. 흉측한 외모의 여성 문신사(文身士), 지독히도 육식을 밝히는 마장동 도축장의 80대 할머니 등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일찍이 한국문학이 경험하지 못한 부류였다. 허를 찌르는 소재, 현장 취재의 땀방울이 묻어나는 실감나는 묘사 등을 통해 그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독자와 평론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 내면의 금기나 치부가 쉽게 까발려져 조각나는 독서 체험은, 시원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이빨 뽑기’ 같았다.

 어느새 등단 15년차. 그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 싶다. 표면적으로는, 따이공(代工) 즉 중국 보따리상을 소재로 한 장편 『잘 가라, 서커스』를 썼고, 고문경관 이근안을 다룬 장편 『생강』으로 ‘당대’와 씨름했다.

 계간 창비 올 여름호에 발표한 본심 후보작 ‘다른 얼굴’은 역시 천운영, 하다가 혹시 천운영이? 하게 되는 작품이다. 그의 친숙한 특징과 변화의 조짐이 동시에 느껴져서다.

 소설은 얼굴 표정의 돌변에 관한 이야기다. 익숙해 뻔한 얼굴 이면에 숨겨진, 제목 그대로 다른 얼굴에 대한 관찰기다.

 주인공은 ‘그녀’로만 표기되는 50대 후반쯤의 독일 교포 여성. 남편이 중소도시 오페라단의 중견 단원으로 자리 잡아 후속 한국인 단원들을 줄줄이 입단시키기까지 그녀는 스시집 ‘토토스시’를 운명하며 낯선 이국땅에서 생활의 중심을 잡았다. 정착 30년, 독일어가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된 그녀는 무뚝뚝한 독일인들의 마음을 얼마든지 누그러뜨릴 수 있을 만큼 상냥함이 몸에 뱄다. 한국인 단원들과 그 가족들을 초대해 1년에 두 차례 여는 파티 때는 음식이 부실할 망정 정원 관리가 소홀해서는 안 된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교양인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물론 주변 인물들의 교양의 뿌리는 허약하다. 그녀는 제대로 된 스시 맛을 자랑스러워 하지만 사실 스시는 한국 음식이 아니지 않은가. 상냥한 얼굴의 터키계 청년에게 지갑을 털려 거액을 잃고 난 후 사람의 얼굴 표정의 진실성에 대한 혼란에 빠진다. 한편 이민 2세대 오페라 단원들은 광부·간호사 등 이민 1세대를 교양 없다고 깎아내리면서도 정작 초대받은 집의 정원은 제대로 감상할 줄 모른다. 무늬만 교양인일 뿐이다. 결정타는 꽃을 위한답시고, 꽃을 뜯어먹는 달팽이를 죽인 소녀의 행동. 그녀는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해 ‘미친 여자’ 소리를 듣는다. 다른 얼굴의 분출이다.

 변화의 징후는 어느 대목에서 찾을 수 있을까. 소설이 단순히 그녀의 변덕스러운 폭력성 묘사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 단서일 것 같다. 소녀가 꽃을 편들어 달팽이를 혼내주려는 순간, 그녀는 달팽이 편도 들어줘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싶어 한다. 정원의 가족 파티, 그것의 확대판일 인생의 크고 작은 사건들은 대개 한쪽 일방의 해석 만으로 재단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다채로운 구석을 거느리고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천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 전에는 상냥한 그녀의 얼굴 안에 얼마나 나쁜 얼굴이 숨었는지 보여주겠어, 라는 식이었다면 요즘은 다양한 얼굴을 가진 게 인간이지, 라고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 더 큰 것 같다.” 후보작은 ‘철든’ 천운영의 다른 얼굴이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천운영=1971년 서울 출생. 소설집 『명랑』 『엄마도 아시다시피』. 신동엽창작상·올해의예술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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