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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3)제73회 증권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62.5」증권파동>
『6·25에 두 번 망했다』-. 60년대 초의 증권가를 아는 사람은 이 말을 기역 한다.
두 번의 6·25란 바로 6·25사변과 62년 5월의 증권파동을 일컫는 말이다.
61년 11월께부터의 매진에 의한 주가조작, 춤추는 주가에 현혹되어 명동으로 몰려들었던 5천3백여명의 투자자들, 62년5월 증시 개장이래 최대의 수도불이행사태, 당시 국가재건 최고회의의 특별조사, 증시의 장기 휴장, 내각수반과 재무장관의 동시사임….
굵직하게 이어지는 이 희대의 경제적 사건으로 증시는 패가망신하는 투기장으로 전락. 공신력을 잃었고 수많은 일반 투자자들이 피해를 보았다.
5윌 파동의 어두운 구름은 61년 5·16혁명 직후 부정축재자처벌 등 경제계의 혼란으로 침체의 늪에 빠져있던 증시가 국채원리금의 지급개시와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발표 등으로 다시 움직이면서부터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잠자던 대증주와 한전주는 연중 최고 시세를 형성, 연말 대납회를 맞았고 62년 대발회와 함께 주가는 「4억원의 증자실시」등 호재와 함께 꿈틀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62년1월15일 주식회사제 증권거래법이 최고 회의를 통과하고 이에 따라 4윌1일부터 증권거래소가 영단제에서 주식회사제로 바뀌게되자 당시 통일·일흥 양 증권회사와 동명증권이 합세하여 대증권과 증금주에 대해 고가로 매진을 계속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거래소주식을 매점하게 되면 거래소운영을 지배할 수 있고 게다가 부동산평가액 또한 상당하므로 크게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속셈이었다.
여기에다 62년 2월 들어 매수 측은 농협보유의 한전주 12만여주를 헐값에 사들여 대주주인 농협소유분을 봉쇄함으로써 본격적인 주가책동전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책동 전에 휘말린 증시에서 매매량이 급격히 늘고 시세가 뛰어오르자 당시 시중의 모든 유휴자금은 물론 고리채자금·곗돈, 심지어는 기업의 사업자금까지도 속속 증시에 빨려들었고 매수 측에서는 이제 가만히 앉아 주가가 연일 상종가로 치솟는 이상고온현상을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붙기 시작한 불길을 잡기란 쉽지 않은 법.
증시의 불은 대증주·증금주 뿐만 아니라 미창·해공·은행주에까지 옮겨 붙어 증시는 걷잡을 수없이 가열돼갔다.
당시 필자에겐 지금도 가슴 서늘한 기억이 남아있다.
어느 날 서울은행에서 근무하고 있던 필자에게 천병규 재무장관으로부터 호출이 왔다.
달려간 필자에게 천 장관은 증시안정에 대한 대책을 묻고 아울러 이 기회에 다시 거래소가 증시관리를 해달라고 말했다.
증시사태를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 없었던 필자는 즉석에서 먼저 정부보유의 막대한 주식을 대량으로 풀어 증시의수요·공급을 원활히 하고 증자를 통해 증권금융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시장관리를 철저히 하여 거래소조직과 보통거래제도를 개편할 것 등을 건의했다.
그러나 결국 재무부의 조치는 증대만으로 끝나 별 효과를 보지 못했고 필자의 거래소복귀도 주주총회에서의 대주주 측 입김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람의 일이란 한치 앞을 모르는 것이, 그때 대주주 측의 필자에 대한 견제조치가 개인적으로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불과 2, 3개월 후에 역사적인 5월 파동이 터졌기 때문이다.
만일 그때 필자가 거래소의 책임자로 갔더라면 권력과 금력이 얽히고 설킨 당시의 상황에서 소신 것 일도 못했을 뿐더러 6명의 거래소임원들과 같이 6개월의 영어생활을 했을 것을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어쨌든 그해 4월 매매량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 총 거래고가 1천1백88억원에 달하는 비상사태가 발생했고 다급해진 거래소 측은 부랴부랴 40억원의 증자를 결의하는 등 대책을 세웠다.
그러나 통일 등 매수 측은 4월말 결제에 내놓을 수도자금이 없었고 이에 거래소는 50억원의 은행융자로 겨우 첫 번째 고비를 넘겼다.
여기에 사장최고의 2천8백%프리미엄이 붙은 대증신주발행은 고주가를 더욱 부채질 해 결국 5월말 매수 후 결제대금은 5백여억원에 달했고 마침내 2백40억원의 수도결제불이행 사태를 빚고야 말았다.
결국 금통위의 전례 없는 2백80억원의 시은 한도외 융자로 일단 사태는 수습되었으나 5월 파동의 여파는 심각했다.
5월 파동의 책임을 지고 당시 송요찬 내각수반과 천 재무장관이 물러났고 세인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업자와 거래소 임원 등 14명의 증권관계인사들이 구속, 기소됐다.
31일간의 휴장 끝에 증시는 62년7월13일 재개되었으나 5월 파동의 상처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있을 것이다.
참으로 5월 파동은 정부의 정책빈곤, 거래소의 시장관리 미숙, 업자의 무모한 투기, 그리고 제도상의 결함 등으로 인한 증시의 일대불상사라 아니할 수 없지만 이재 5월 파동은 「상처」아닌 「교훈」으로 기억돼야 하지 않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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