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0) 비규격의 떠돌이 인생-제72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다음날 부산행 찻간에서도 나는 좌석에 앉지 않고 세면소 한구석에서 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천연두가 법정전염병이란 것은 나도 안다. 문명인의 양식으로서는 대전서 자진신고해서 격리병실로 가야했다. 그리나 사고무친한 대전서는 그럴 용기가 나지않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부산까지는 가야겠는데… 거기는 고모님도 계시고 일가친척들도 있다.
대구를 두어 정거장 앞두고 차장이 내 곁으로 오더니『어디까지 가시지요?』하고 묻는다.승객중의 누군가가 수상쩍게 생각해서 차장에게 귀띔을 했는지도 모른다. 『동경까지 갑니다….』내 대답에 차장이 거듭 『실례지만 얼굴이 왜 그러시지요?』 역시 내 얼굴이 문제가 된 모양이다.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면서도 아주 태연하게,
『이겁니까? 열이 솟쳐서 발진한 건데요. 보기 흉하지요? 꼭 천연두같아서 남의 앞에 얼굴 내놓기가 창피하네요….』
그러고는 웃었다. 차장은 병인같지도 않은 내 태도에 안심을했는지 『조심하십시오』 (오다이지니)하고 물러 갔다. 그러나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혹시나 대구역에서 내리게 되지나 않을까?
전염병환자가 발견되면 기차며, 여관이며 내가 지나간 자리는 모조리·소독을 해야한다. 「콜레라」나「티푸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대구역에 닿았다. 아무일도 없었다. 다음 난관은 종착역인 부산―, 하얀 위생복을 입은 방역원들이 들것을 들고 와서 대기하고있는 그런 광경이 머리를 스쳐간다.
밤 10시가 지나 종착역을 하나 앞둔 부산진역에 기차가 닿았다. 거기서 내려 등화관제로 컴컴한 정거장을 빠져나와 수정동 고모님댁으로 갔다. 그리로 와있을 편지들이 궁금했다.
편지나 찾아 역으로 되돌아와서 대합실에서 하룻밤을 새우리라―. 나중에 고모님댁에 소독반이 나와서 소란을 피우게되면 난처하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마당에 서서 편지를 주십사하는 내게 고모님은 왜 들어오지 않느냐고 야단야단 이시다. 할수 없이 사정이야기를 했더니 역에서 밤을 새우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펄펄 뛰신다. 도리없이 나는 고모님에게 끌리다시피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밤중에 군불을 때고 밥을 짓고 새 이부자리를 나르고…. 나는 김이 나는 밥상 앞에서 눈물겨운 마음으로 육친의 정을 가슴 아프게 새겼다.
날이 밝자 일찍 아침을 마치고 걸어서 초량역앞에 있는 철도병원으로 갔다. 접수에서 진찰을 청하자 접수계의 아가씨가 무슨 병이냐고 묻는다. 천연두라는 말이 좀 거북해서「급환」이라고 대답하자 진찰권을 보자고한다. 일어로 「급환」 과 「구환」은 같은 음이라 그 아가씨가 내 말을「구환」으로 잘못 들은 모양이다.
옥신각신하던 차에 젊은 의사하나가「슬리퍼」를 덜덜 끌면서 현관쪽으로 나왔다.
『무슨 병인데요?』 하고 묻는 의사에게 나는 방공두건을 벗어 얼굴을 보이면서 천연두가 아닌가 싶다고 했다.
젊은 의사는 바지 양쪽 주머니에 두손을 찌른채 현관에 서있는 나를 내려다보면서 『전염병은 여기서는 못봅니다. 격리병실도 없구요. 부립병원으로 가시오.』
거중에서 그렇게도 안절부절 못했던 내극성이 서글퍼졌다. 『부립병원은 어떻게 가면 되나요?』부립병원을 모르는게 아니다. 혹시구급차라도 연락해 주지 않을까해서 물어본 것이다.
『이 앞에서 전차를 타고 차장더러 물으면 압니다.』그 대답에 어이가 없어서 내 말이 뾰족해졌다.
『아니 전염병환자가 전차를 타도 좋은가요? 당신은 의사라면서 그런 상식도 없나요? 식민지의사는 과연 다르군요? 환자와 의사가 거꾸로 된 셈이니…』
뱉아버리둣이 한마디 하고 병원을 나와 나는 전차길을 따라 부립병원 쪽으로 걸어갔다. 채 5,6분도 못가서다. 저 쪽에서 인부같은 두 사람이 가까이 오더니 종이조각 하나를 내 보이면서 『여기로 갈라면 어떻게 갑니까?』 하고 묻는다. 하나는 팔을 다쳤는지 목에서부터 흰 헝겊으로 한쪽 팔을 달아맸고, 하나는 곁에서 부축을 하고있다.
종이에 써진「영제병원」은 초량서는 이름난 제법 큰 병원이다. 말로 길을 가르쳐 주다가 이왕이면 그 병원까지 데려다 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 따라 오시오…』하고 앞장을 서서 큰길을 바른쪽으로 들어가 영제병원을 가르쳐 주고 되돌아 서려는데 뒤에서『선생님!』하고 누가 부른다. 돌아다 보니 겸창로 자주 나를 찾아오던 경응대학의 학생인 L군이었다.『L군 아닌가! 어째서 여기?』
내 눈이 둥그래지자 L군은『여기가 제집이 아닙니까…. 그런데 선생님은?』하고 L군이 묻는다. 그러고는『좌우간 들어가십시다』한다.
L군이 영제병원 아들인 줄은 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L군의 얼굴을 본 순간, 그 생각이 선뜻 나지 않았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