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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불은 껐지만 숙제는 여전|쿠데타 진압후의 스페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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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스페인」민병대의 「쿠데타」실패는 지난 수년간 힘겹게 민주화의 길을 걸어온 「스페인」이 가장 심각한 시련과 위기를 극복해 냈음을 뜻한다. 이는 또 「쿠데타」지압의 주역이었던 「카를로스」국왕의 입장을 강화해주고 군부의 숙청작업결과에 따라서는 민주화작업울 더욱 강력히 추진해 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뜻도 지닌다.
그러나「쿠데타」의 진압이 곧 이번에 표출된 문제들을 해결한 것은 아니고 이 사건자체가 오히려 「스페인」의 허약한 구조를 드러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게다가「쿠데타」기도는 당초 예산보다 군부안에 많은 동조세력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어 그 정치적 여파는 상당히 심각할 것으로 보인다. 「카를로스」국왕의 입장이 강화되리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로 「바스크」분리주의자들에 대해 강경책을 쓰도록 요구하는 군부의 압력도 전혀 무시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실상 이번 사건은 75년11월 「프랑코」총통 사망후 「스페인」이 걸어온 불안한 여정을 돌이켜볼때 새삼 놀라운 일도 아니며 어쩌면 그동안 누적되어 있던 많은 문제들이 빙산의 일각처럼 모습을 드러내 보인데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다.
서구식 민주주의에의 걸음마를 시작한 「스페인」은 지난 5년간 계속된 군부의 불안한 움직임, 실업증가, 잇단 파업사태,「바스크」분리운동 주의자(ETA)들의 「테러」격화등 정치·경제·사회적 불안이 팽배해왔다.
이같은 불안 요소들은 「프랑코」추총자들의 불만을 불러 일으켰으며 심지어 「프랑코」 통치체제에 대한 향수마저 노정시키기에 이르렀다.
「프랑코」사후 국왕에 즉위한 「환·카를로스」왕은 『국민이 모두 참여하는 자유롭고 온건한 사회』를 지향하면서 단계적인 자유화 정책을 추진했다.
「카를로스」국왕의 유연한 정치수완에 따른 「스페인」의 민주화는 서구 여러 나라에 청신한 맛까지 주었다.
76년7월 「수아레스」정권이 들어선 이래「카를로스」「수아레스」체제는 예상 이상의 속도로 민주화정책을 진전시켰다.
정치개혁안에 대한 국민투표와 총선거를 거쳐 78년12윌 새헌법이 발효되기 까지의 과정은 놀라울 만큼 순조로왔다.
자유주의적 성향이 짙은 「수아레스」수상은 77년10월 경제위기를 구하기 위해 사회노동·공산·인민등 좌파들과 타협, 광범한 경제정책협정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공산당과 노조의 합법화가 이루어져 우파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게다가 『「스페인」의 기적』 이라고까지 불리던 60년대의 경제성장은 73년의 석유위기와「프랑코」체제 붕괴후의 혼란까지 겹쳐 불황의 늪에 빠져 들었다.
1인당국민총생산(GNP)이 절대액에서는 거의5천「달러」수준(80년) 까지 육박했지만 그 성장률은 3.1%, 79년에는1%, 80년에는 「제로」성장으로 둔화되어 왔다. 이러한 불황은 80년의 실업률 12%(1백50만명),「인플레」15%로 나타나 중심기업의 도산사태까지 잇달았다.
최근에는 이혼법안, 사학개혁법안, 세제개혁안을 두고 집권당인 민주중도연합당(UCD)의 내분이 두드러지기도 했다. 의회내에서 합의이혼을 허용하자는 법안이 논의되고 4분의1을 차지하는 「카톨릭」계 사학의 국가관리안이 검토되면서 종교계와 UCD내의 기민당파가 반발하고 나섰다.「수아레스」정권은 또 고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누진세과세법을 추진, 대자본가계층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이같은 자본가와 「카톨릭」교회의 반감에 덧붙여 정부 각조직체에 온존해 있는 「프랑코」정신 신봉자들의 저항이「스페인」의 민주화개혁 작업에 제동을 걸어왔다.
여기에 「스페인」이 당면한 더욱 심각한 문제는 「바스크」를 비롯한 「카탈로니아」 「안달루시아」지방등의 분이독립 운동이다. 특히「프랑스」와 접경하고 있는 북부의 「바스크」지방에서는 「수아레스」 정권이 허용하려던 자치정부수립의 단계를 넘어 독립을 요구하는 『「바스크」조국과 자유』(ETA) 「게릴라」활동이 격화되어 「마드리드」정부를 괴롭혀 왔다. 이들의 「테러」표적은 주로 국내치안을 담당한 민병대, 경찰조직에 집중되어 지난해 1년동안에만도 1백2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코」를 신봉하는 극우 보수세력에는 이러한 상태가 완전히 중앙정부의 무능에 따른 무정부상태로 비쳤다. 군부의 대부분은 「프랑코」사후 정치개입을 애써 삼가며 공산당의 합법화까지 용인했으나 「바스크」족에 자치를 허용하려는 「주아레스」전 수상의 정책에 대해서는 『「스페인」의 통일』을 이유로 불안감을 보여왔다.
군부 일각에서 「쿠데타」를 시도했던 것도 이같은 불만세력의 호응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극우세력보다는 역시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의지가 강했고 「카를로스」국왕의 「헌정 수호」 결의가 단호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쿠데타」시도로 중단되었던 국회의 수상인준도「소텔로」로 낙착됨으로써 「스페인」내정위기는 일단 끝났다. 그러나 우선 해결해야될 문제들이 많이 남아있다.
「카를로스」국왕이 군부를 일단 장악하기는 했으나 문제가 해소된 것은 아니다. 「카를로스」국왕은 「바스크」족의 「테러」에 대한 군부의 격분을 잘 알고있다. 「쿠데타」진압과정에서 보인 그의 능력을 바탕으로 계속 「스페인」을 이끌어 가야할 경우 군지도부의 입장을 고려해야 할 것으로 관측통들은 보고있다.
【파리=주원상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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