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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교양] '신의 전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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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전사들/제임스 레스텀 지음, 이현주 옮김/민음사, 1만3천원

'신의 전사들'은 탐욕과 애정, 그리고 잔혹과 드라마로 채워진 논픽션이다. 저널리스트이자 퓰리처상 수상작가 제임스 레스턴은 실제 역사를 유려한 문체로 재구성하는 이 방면의 달인이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갈릴레오를 바라본 '갈릴레오의 삶', 유럽 역사의 독특한 해석서 '최후의 계시' 등 그의 예전 저술에서도 그의 진면목이 이미 드러난 바 있다.

그는 '신의 전사들'에서 십자군 전쟁의 객관적 사실을 탐구해, 십자군을 선으로 보고 이슬람을 악으로 규정한 서양 교과서의 오류에 도전한다.

제3차 십자군 전쟁의 양대 주역은 영국 사자왕 리처드와 이슬람 술탄 살라딘이었다. 제임스는 그들을 천칭 양쪽에 올려놓음으로써, 엄격한 역사 서술의 전범을 보여준다.

인류 역사가 입증하듯 전쟁광들이 가장 고심하는 건 누구를 언제.어떻게 공격해 승리를 쟁취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의 명분을 만드는 일이다.

중세 유럽도 그랬다. 그들은 상업의 발달로 부와 권력을 쌓은 귀족들이 서로 충돌하며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 교황은 귀족들의 힘을 결집해 유럽의 질서와 통합을 이루고자 전쟁을 기획했다. 이러한 실제 목적은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위장됐고, 자연히 전쟁 중에 십자군 스스로도 자신이 왜 전쟁터에 와 있는지 깜박 잊는 일이 곧잘 벌어졌다.

가령 영국 왕 리처드는 아크레를 함락한 뒤에 전리품을 독점한다. 그 전리품이 4년 전에 이슬람 교도에게 빼앗긴 예루살렘 왕국의 재산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고질적인 망각 증상은 전쟁의 마지막 순간까지 반복된다. 천신만고 끝에 예루살렘 앞에 이르러선, 이집트 거상이 낙타와 말에 물건을 싣고 남쪽을 지나간다는 정보를 듣고 갑자기 정신착란에 빠진다. 그는 곧바로 기수를 돌려 대학살을 저지르고 재물을 약탈한다.

리처드의 동성애 상대이자 권력 경쟁자인 프랑스 '존엄왕' 필리프는 이 전쟁의 도덕성에 의문을 던지는 탁월한 조역이다. 명예 실추와 불공평한 전리품 분배에 격분해 먼저 돌아가면서, 귀국길에 로마에 들러 영토 문제를 놓고 푸념한다.

그러자 교황 켈레스티누스 3세는 "십자군의 동기가 저속하게 타락했다"고 탄식한다. 애당초 전쟁을 결정한 당사자의 이 한 마디는 십자군 전쟁의 추악함을 보여준다.

사자왕에게 결국 패배를 안겨준 무슬림 지도자 살라딘은 오늘날 모든 종교의 근본주의자들에게 교훈을 던진다. 그는 어떤 극한상황에서도 예루살렘이 무슬림의 성지인 동시에 기독교인의 성지임을 직시했다.

예루살렘을 치면서 이슬람 교도와 유대인들을 잔인하게 죽여 무릎까지 피가 차오르게 만든 십자군과 달리 예루살렘 재탈환 때 인내심을 발휘한 협상을 통해 무혈입성했다.

또한 리처드와의 대결에서 최후 승리를 거두는 순간에도 이후의 기독교인의 예루살렘 순례를 승인했다.

살라딘의 관대한 영혼은 야파 전투의 익살스러운 에피소드에서도 빛을 발한다.

그는 리처드가 보병들 틈에서 칼을 휘두르는 걸 보고 부하에게 지시한다. "말을 끌고 가 리처드 왕에게 주어라. 그처럼 위대한 인간은 보병들과 섞여 싸워선 안 된다." 강경파들이 성묘교회를 부수자고 주장할 땐,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렇게 잘라 말했다. "내가 믿는 종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도 인정할 때 진정한 평화가 온다."

원재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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