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광고쟁이, 어떻게 선거의 달인이 됐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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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4. 온갖 악재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이 7·30 재보궐 선거에서 거둔 압승의 결과다.
야당의 헛발질 때문에 (야당이) 질 수 없는 선거를 또 졌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이번에도 역시 여당 승리의 숨은 공신은 야당이 아닌 여당 안에서 찾는 게 옳다. 진정성이란 말이 넘쳐 흐르는 시대지만 선거란 결국 유권자 맘을 사로잡는 아이디어 승부이기도 하니, 그 싸움을 진두지휘한 사람에게 공이 있다고 할 수밖에. 그 인물은 잘 알려진대로 조동원 전 새누리당 홍보기획본부장(57)이다.

7·30 재보궐 선거에서 조 전 본부장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등에게 반바지를 입혔다.

그는 지난 2012년 총선·대선에 이어 2014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거쳐 이번 재보궐 선거까지 네 번의 굵직한 선거를 이끌며 새누리당에 승리를 안겨줬다. 당 대표도, 그렇다고 선대위원장도 아닌 인물에게 너무 과한 평가가 아니냐고?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움직일 때마다 “또 쇼 한다”는 야당의 빈정거림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는 새누리당에 표를 줬다. 2012년 그의 첫 정치판 데뷔작인 대선 때는 당 이름을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당 색(色)을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꾸는 파격으로 유권자에게 다가갔다. 세월호 사건으로 민심이 요동치던 6·4 지방선거 때는 야당의 전매특허였던 릴레이 1인 시위로, 또 이번 7·30 재보궐 선거에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에게까지 반바지 입히고 빨간 모자를 씌운 재기발랄함으로 불리한 판세를 뒤흔드는 데 일조했다. 그러니 공신이라 불러도 그리 과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이젠 손 대는 선거마다 승기를 잡는 ‘미다스의 손’처럼 회자되지만 사실 조 전 본부장은 완벽한 아웃사이더에 불과했다. 금 배지 한번 달아보지 않은 그가 어떻게 백인백색의 거대 여당을 움직일 수 있었을까. 답은 남다른 추진력, 그리고 쉴 새 없이 쏟어내는 기획력에 있었다.

강지연 새누리당 홍보국장은 “일단 뭘 하기로 정하면 추진력이 매우 강하다”며 “주변 눈치 보지 않고 될 때까지 무조건 밀어부친다”고 말했다. 7·30 보궐선거 직전엔 김무성 대표 등 주요 당직자들 상의를 벗기고 바디 페인팅을 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강 국장은 “조 전 위원장은 이런 대경실색할 아이디어를 하루에 하나씩 냈다”며 “싸우는 것도 한두번이지, 하도 스트레스를 받아 위 경련을 일으켜 실려간 적도 있다”고 했다.

2012년 1월 홍보기획본부장으로 처음 영입됐을 때 ‘파란 한나라당’을 ‘빨간 새누리당’으로 바꿀 때가 대표적인 예다. “한나라당이 빨갱이냐”“머리 나쁜 새XXX당이라는 거냐”는 비난까지 나왔다. 그래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조 전 본부장이 직접 새누리당을 바꾸는 혁신위원장으로 영입했던 이준석(29) 위원장은 “이런 스타일 때문에 대선 당시 나랑은 물론 박근혜 후보와도 많이 싸웠다”면서도 “다른 사람이 아무리 세게 반대해도 늘 ‘이게 어때서’라는 당당한 태도를 보여 놀랐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또 “조 전 본부장은 자기가 내놓은 초안이 바뀌는 걸 정말 싫어한다”며 “누가 좀 바꿔보려고 하면 ‘이렇게 안 할 거면 아예 하지 마라’는 입장이었다”고 덧붙였다. 한마디로 일단 하겠다 고 내놓은 사안에 대해서는 독불장군식 태도를 보인 셈이다. 소통의 시대라는데, 완전히 시대에 역행하는 캐릭터다.

하지만 이 위원장은 “그게 가능한 건 조 전 위원장이 워낙 아이디어가 많고, 또 내놓은 아이디어가 채택되지 않으면 새로운 뭔가를 ‘잽싸게’ 내놓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런 성격은 정치판에 들어가서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웬만해선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 성격은 그가 광고판에 있을 때도 똑같았다. 그는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과학입니다’라는 에이스침대 광고 카피로 유명세를 떨친 광고전문가다. 그와 오리콤에서 같이 근무했던 조원규(57) 서울광고기획 부사장은 “광고업계 특성상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지만 조 전 본부장은 그 중에서도 센 편이었다”며 “동료들이 다 ‘말도 안되는 아이디어’라고 해도 ‘내 생각이 옳다’며 끝까지 고집할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일화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가 오리콤 재직 당시 회사의 대표 카피라이터로 꼽혔다는 걸 감안하면 남들은 이해 못하는 그의 고집이 시장에선 통할 때가 많았던 셈이다.

조동원 새누리당 전 홍보기획본부장이 광고계에 있을 때 만든 ‘TTL-토마토편’ (1999).

서강대 후배이기도 한 이시혁(54) SK플래닛 고문과의 일화가 이를 설명해준다. 이 고문은 1999년 SK텔레콤에서 마케팅 전략을 짜는 프로모션팀장을 맡아 TTL 광고 입찰 등을 맡았다. 당시 조 전 본부장 팀도 참가했다. 이 고문은 “그 당시 통신회사 광고는 통화 품질이나 통화 범위에 중점을 둘 때였는데 조 전 본부장은 한 소녀(배우 임은경) 머리 위로 물고기가 지나다니는 컨셉을 내놨다”며 “화면은 물론 ‘스무살의 011’라는 카피도 다들 황당해하며 반대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광고는 시리즈로 만들어질 만큼 많은 화제를 낳았다. 이 고문은 “광고주와 광고대행사라는 명백한 갑을 관계 속에서도 조 전 본부장은 자기 할 말 다 했다”고 했다.

남 눈치 안 보고 할 말 다 하는 것도 똑같았다. 다음은 역시 오리콤 출신인 정상수(55) 청주대 광고홍보학과 교수가 떠올리는 일화. 1980년대 말 한 사석에서 당시 광고 영상을 제작·기획하는 PD였던 정 교수와 카피라이터였던 조 전 본부장, 그리고 광고 디자이너가 한 자리에 모였다고 한다. 정 교수는 “직군 별로 서로 다른 영역에 대해선 언급을 하지 않는 게 불문율처럼 통용되던 경직된 분위기였다”며 “그런 상황에서 조 전 본부장이 영화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도 본 적이 드문 원조 SF영화 ‘메트로폴리스(감독 프리츠 랑, 1927년 작)’를 거론하며 참고하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마치 회계사 앞에서 회계학에 대해 떠드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기분이 상하기보단 조 전 본부장의 다른 분야에 대한 열정에 놀랐다”고 말했다.

이 고문은 “조 전 본부장은 끼가 많은 사람”이라며 “커리어 시작을 광고업계에서 했을 뿐 다른 분야에 항상 관심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의 정치판 입성이 우연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후 영화 ‘후아유’(2002)를 만들기도 했다.

조 전 본부장은 93년 오리콤 동료 박인춘·박춘우 두 사람과 함께 화이트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광고회사를 차려 독립한 후 2002년 명필름과 함께 영화 ‘후아유’를 제작하는 등 영화산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하지만 광고계에 몸 담았을 때와 달리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영화 흥행은 저조했고 2005년엔 사업 파트너들과 불화까지 생겼다. 설상가상 2005년에 서초구 양재 시민의숲 안에 조성한 영어마을은 영업 부진으로 6년여 만에 문을 닫았다. 최근 박인춘씨에게 조 전 본부장에 대해 묻자 “아무런 얘기도 하고 싶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여러 번의 실패로 그는 ‘잊혀진 존재’가 됐다. 그러니 2012년 그가 한나라당 홍보기획본부장이 됐다는 소식에 광고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과 대학(서강대) 동문이라 영입된 게 아니냐는 억측이 나왔다. 하지만 조 전 본부장은 과의 통화에서 “전혀 아니다”고 부인했다. 영입 전에 박 대통령을 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가 직접 설명하는 영입 뒷이야기는 이렇다. 2011년 12월 31일 밤 한 광고계 후배를 통해 영입 제안 전화를 받았고, 바로 다음날 오전 거절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만나보고 판단하라는 이 후배의 제안대로 그날 오후 ‘이 사람’을 만났고, 30분 만에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 사람’이 누군지는 밝히지 않았다.

조 전 본부장은 자기 고집대로만 밀어부친다는 세간의 평가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판단을 내리기 전 주변 사람에게 많이 묻는 편”이라며 “사심없이 말해주는 지인 너댓명이 있는데 무슨 일이든 결정하기 전에 의견을 꼭 묻는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전장 같은 선거에서 일단 정하면 좌고우면 하지 않고 빨리 일을 처리 하다보니 독불장군처럼 비춰질 뿐”이라고 덧붙였다.

조한대 기자 ch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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