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입안에서 녹는 돼지숯불구이|전남 곡성군 석곡 돼지고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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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석곡와서 쇠고기 찾으면 촌사람이여. 입에 살살 녹는 돼지고기 놔두고 뭐땀시 노린내나는 쇠고기를 먹어.』
쇠고기가 돼지에 눌려 고기대접을 못받는 마을이 있다.
전남곡성군 석곡이 석곡리-.
이곳에선 앞머리 단어를 빼고 그냥 「고기」하면 「돼지고기」를 뜻한다. 단두군데 석곡 돼지고기를 파는 음식점에선 안내판에 「불고기 백반」이라 써놓았지만 내놓는 것은 당연하다는 듯「돼지불고기」다.
석곡 이름 그대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마을 한가운데 염곡천이 흐르고 남북으로 두줄 길이 평행선을 긋는다.
염곡천을 사이하고 북으로 노폭12m의 황토자갈길이 달리고 남으로는 13.2m로 포장된 남해고속도로가 띠처럼 뻗었다. 광주가 1백40리·순천이 1백40리, 꼭 중간지점이다.
『옛날엔 순천서 새벽밥 먹고 길나서면 석곡서 밤을 보냈지. 장날 하루 벌어 나흘 먹는다는 장터주막거리여.』 이 마을 한석우 노인(75)의 말대로 교통의 요새로 생긴 마을이다. 구도로는 마을입구에서 또 남원과 구례로 가는 지방도와 갈라져 석곡은 네 갈래 길이 모이는 목이다.
석곡 돼지고기도 이 길목과 장터 때문에 더욱 소문이 났다. 사시사철 구름처럼 오가는 장사치·나그네들을 상대로 마을엔 큰 주막과 별미가 마련되었다.
『커다란 초가 네채에 밤낮없이 손님이 바글거렸지라우. 내 낳기도 전 우리 할머니가 젊어서부터 했다는디 시방도 늙은 장꾼들이사「마방집」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구먼요.』
석곡 돼지요리의 원조격인「마당집」손자 김선곤씨(59)는 어릴적 기억을 생생히 되살린다. 우마차가 교통의 가장 빠른 수단이던 시절, 김씨의 할머니가 경영하던 대주점 「마당집」에서부터 석곡 돼지고기의 70년 전통은 시작된다.
숯불구이가 진미. 『돼야지는 꼭 석곡서 키운 놈을 썼지. 그것도 1백50근을 넘으면 맛이 없어 안쓰지. 알맞추 큰놈을 잡아 숯불구이를 하는디 고기가 아니라 그냥 솜사탕이어.』 한 노인은 석곡 돼지고기 요리는 「마방집」안주인의 솜씨와 별나게 키운 석곡 돼지가 조화를 이룬 맛의 작품이라고 한다.
메마른 골짜기에서 호당 1천8백여평의 농사는 오히려 부업. 주인들은 너나없이 보부상·거간·수집상·짐바리꾼으로 장터 일을 하고 그 외엔 돼지를 길러 생계를 보탰다. 부족한 사료를 걱정하다가 착안한 것이 바로 「별나게」키우는 방법. 비계가 없고, 육질이 연한데다 고소한 맛이 특징.
이런 돼지를 1백20∼1백50근으로 살과 기름이 적당히 올랐을 때 잡는다. 숭덩숭덩 썰어서는 파·마늘·생강·깨·참기름·고추장 등 갖은 양념에 버무려 하룻밤쯤 쟀다가 숯불에 굽는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참숯불에 노릿노릿 구워낸 고기는 꼬들꼬들한 것이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민물 새우 토화젓과 벌건 배추통김치를 곁들여 내놓는다. 주위산골에서 뜯은 향긋한 꼬들배기김치를 함께 곁들인다.
상에는 구이 외에 탕·볶음·찌개·수육 등 돼지고기로 만들 수 있는 갖가지 형태의 요리를 같이 올렸으니 밥과 국을 빼곤 모두 돼지고기 일색인게 석곡 상차림이다.
고기가 모자라면 달라는 대로 더 준다. 웃돈은 사양한다. 인심마저 돼지를 닮아 푸짐하다.
김씨는 한참땐 하루에 돼지를 두마리씩 잡았다고 한다. 그런 날은 2가마 밥을 지어 백반 1천상을 팔았단다.
김씨 할머니가 돌아가고 「마당집」은 그의 어머니 이중이씨(74)가 대를 물러 친정고향 이름을 따「순천관」으로 개명했다. 이름은 바뀌었어도 후한 인심과 맛은 그대로다. 소문이 나면서 인근 광주·순천·여수 등은 물론 멀리 서울·부산·목포 등지서까지 일부러 돼지고기를 먹으러 석곡을 찾는 미식가도 있다.
그런 순천관이 문을 닫았다.
73년11월 개통한 남해고속도로는 주막거리 마을에서 손님을 앗아가 버렸다. 하루 6백여대씩 국도로 왕래하며 머물던 「버스」「트럭」이 이제는 고속도로를 타고 석곡을 건너다보며 1시간20분만에 광주∼순천을 오가게 되었다.
석곡은 하루아침에 파장을 만났다. 길이 만든 마을이 길의 변천에 따라 쇠퇴하는 「아이러니」를 보게된 것이다. 상인들은 광주로 이사를 가고 마을인구도 줄어들었다.
순천관은 팔려 없어지고 석곡식당(주인 김선중·39)과 금성식당(주인 제갈시덕·여·62) 두곳만이 이 마을 돼지고기요리의 명맥을 잇고 있다.
『당국에서 위생문제를 들어 예전의 돼지사육법을 금하고 있는디 뒷간돼지의 맛을 살리려면 뭔가 연구를 해야 할 것이구먼.』 금성식당주인 제갈 할머니의 말이다.
요즘 돼지불고기백반은 한상에 1천2백원. 예전같이 탕·볶음을 곁들이지는 못하고 덤고기도 줄 수가 없다. 그러나 석곡 돼지 맛만은 그대로다. 지금도 꼭 석곡 재래종만 잡는단다. 「별난」사육법 금지 후 재래종은 자꾸만 줄어든다. 「별난」사육을 안하면서 내 고장 맛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애향심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곡성=문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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