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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큰 기사」홍수로 대형제목 사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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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최초의 독자, 최후의 기자라는 편집기자들. 유난히도 「큰일」이 많았던 올해엔 「최초의 독자」노릇은 그런대로 해낸 것 같으나 「최후의 기자」구실은 과연 제대로 해냈는지…. 올해 봄 신문주간 표어가 『언론의 자유와 책임』이었던 것도 지내고 보니 상당히 시사적인 면이있었던 것도 같다. 취재기자들보다 <큰 글자로 기사를 쏜다>는 긍지로 막후에서 뒷바라지만 해야하는 고생을 잊는 편집기자들에게는 가장 경쟁이 심한 한해였는지도 모른다. 종래와 같은 특종이 거의 불가능했던 올해는 타지와의 승부가 거의 발표기사를 적절한 크기로, 적절한 표제를 달아 어떻게 적절한 자리에 배치 했느냐로 판가름이 났기 때문이다. 언론통폐의 소용돌이도 어느 정도 가시고…증면이 되는 내년엔 밝은 기사들로만 지면을 장식했으면 하는 소망을 안고 「데스크·메모」를 뒤적여본다.
○…80년에 들어서자 지난해 연말의 격동과는 달리 겉으로는 조용한 나날이 계속됐다.
사내에선 박 대통령 시해 사건 군재 피고인들의 신문 변론 속기록의 「게라」(교정을 보기 위해 기사를 활자화한 것)가 계속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켰다.
지내놓고보니 실소감이지만『공화·신민 총선 전략마련』『양당, 「폐어·플레이」를 다짐』등등의 기사가 지면을 장식했다. 『개헌주도는 국회가 해야한다』『정부가 해야한다』 는 등의 입씨름도 심심찮았고 신문은 열심히 이를 기사와 했다.
대권을 겨냥, 대통령 선거 유세를 방불케 한 「3김씨」의 전국순회와 대학 연설 등이 줄이어 출고될 때 편집기자들은 「형평을 기하기 위해」애를 먹었다.
이 무렵 전후까지도 결과적으로 오보가 돼버린 「5인 교수 헌법시안」이다, 「국회특위개헌안」이다 하는 것 등을 각 신문이 경쟁적으로 싣기도 했다.
봄이 되면서 『족벌운영철폐요구』로 학원가가 술렁대자 지면에도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4월로 접어들어 대학의 「이슈」가 『집체 훈련거부』로 변질되면서 편집기자의 심신의 피로는 가중돼 갔다고

<항의 전화만 빗발>
○…5월 들어 학생「데모」의 열풍과 최루탄「가스」냄새가 지면을 혹사하기 시작했다. 강산이 변할 만큼의 시공과 연륜으로 쌓아 올린 체제가 급변하는데 따른 혼돈은 자(척)로 잴수도, 활자크기로 표현할 수도 없었다.
『「데모」좀 못하게 할 수 없느냐』고 「데스크」에 빗발치는 노점상들의 항의 전화와「데모」기사가 미흡하지 않느냐는 젊은 목소리의 「으름장」. 「알권리」와 「알려줄 의무」의 틈바구니에서 되풀이 되는 숨바꼭질은 병살위기의 주자만큼이나 곤혹스런 것이었다.
○…비상계엄 전국확대실시에 따른 정치활동 금지,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렸던 5월17일 밤(18일이 일요일이라서 밤새 호외발행)부터 5월 말까진 글자 그대로 역사의 한장을 기록하는 1면 머리기사가 시커멓게 지면을 채웠다.
△『김종필씨·김대중 연행조사』(19일) △『대법원, 김재규 사형확정』(20일) △『광주사태발생』『신현확 내각사표』(21일) △『광주일원서 시민「데모」』(22일) △『광주시민 무기회수, 자체수습 나서』(23일) △『김재규 등 5명 사형집행』(24일) △『최 대통령, 광주서 담화발표』(26일) △『계엄군, 광주시에 진입』(27일)『국가보위비상대책위 발족』(31일) 등 모두가 80년 아니면 있을 수 없는 「큰 기사」들이었다고 이중 22일의 『박충훈 내각발족』 기사는 흔치않은 「대폭개각」이었으면서도 「광주사태」에 밀려 3면에 질려 개각기사로는 해방 후 처음 1면서 밀려난 선례를 남기기도 했다.
검은 바탕에 흰 글자 「컷」이 1면 머리 2단 전단으로도 부족해서 3단 짜리까지 동원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편집기자들 중에는 『이러다가 우리 힘으로 남북통일을 이뤘을 때는 제목크기를 어떻게 해야되나…』지레 걱정하는 사람도 생겼다.
○…「5·17」후 「3김씨」가 모두 「정치의 장」에서 퇴진하는 기사를 다룰 때는 새삼 「정치무상」이란 말이 실감났다.
어느 해나 마찬가지겠지만 올엔 유난히도 많은 낯선 말들이 등장, 어느새 제목 용어로 거침없이 쓰였다.
이후락씨의 귀국회견 때 나온 「떡고물」, 공화소장 의원들이 벌인 「정풍」운동, 신민당의 「신풍」운동, 개헌 논쟁 때 나온 듣기조차 생소한 「이원집정부제」, 「새 시대 새 질서」를 위한 「숙정」「사회정화」작업, 정치활동 규제자의 구제 발표 때 나온 「해금」등.

<쏟아진 낯선 용어>
○…5월말 국보위가 발족되고서도 몇 달 동안은 정치주도세력은 취재 「레이다」에 잡히지 않아 「주먹구구」기사가 심심찮게 지면을 차지했다.
8월께부터 『안개정국』이 걷혀 정치구조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당부의 말씀』이 거의 말미에 붙는 주요발표가 잇달았다.
이때부터의 주요발표는 사전에 부분 부분이 흘러나와 최종 발표 때는 김이 빠져 큰 기사인줄 알면서도 어떻게 취급을 해야할지 판단이 잘 안서는 경우가 많았다.
김대중 등 공소장이 발표되던 8월14일엔 이례적으로 4면을 증면, 4, 5, 9, 10, 11, 12면 등 무려 6개면 전면에 걸쳐 이를 게재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하루에 몇 건씩 큰 발표가 쏟아져 쩔쩔매다가 발표가 없는 날은 또 절대량이 모자라 쩔쩔매는 일이 이 무렵부터 비일비재했다.
때로는 똑같은 기사를 가지고 두벌 세벌 제목을 달아야하는 경우도 경험해야 했다.
○…다사다난하긴 경제계도 마찬가지. 새해 1월12일「달러」당 4백84원이던 환율을 5백80원으로 올리고 동시에 연리 19%의 금리를 25%로 대폭 인상한 최초의 경제조치가 있은 후 올들어 세모까지 터진 경제조치는 크고 작은 것을 함께 합쳐 60여가지.
불황의 주름살은 그대로 지면에 나타나게 마련이어서 어두운 기사가 줄을 이어 『밝은 맑은 기사를 발굴게재하자』는 편집방침과 어긋나는 경우가 많았다.
기름 값이 미친 듯 뛰고 예고지표가 6개월이나 0·4를 기록하는 등 경기가 바닥을 헤매다보니 자연히 주어진 기사는 『물가, 한해에 50%이상 껑충』아니면 『○○「그룹」도산』.『내년도 임금인상전망 흐려』등이 경제면제목의 대종일수밖에 없었다.
○…1월말 유가가 무려 59%나 인상되고 이와 함께 25개 주요 공산품값도 『현실화』되자 『물가연타…해도 너무했다』며 사회면 편집기자는 울분을 터뜨렸다.
인정과 미담이 어린 밝은 사회상만을 전해주고 싶은 편집기자의 소망은 첫 얼굴부터 무참히 깨진 것이다. 『공산품 값 대폭인상 발표가 오늘 하오3시에 있다는데…』경제부장 예고에도 『3판(영·호남지방 발송판)부터 실읍시다』편집기자의 대답은 시들.
다소 무리를 하면 2판(서울시내관)부터 게재할 수도 있는 기사였지만 『현실화』『조정』 엔 이미 불감증에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구두쇠작전으로 물가고에 맞서자 신문도 이를 소개하기에 바빴다.
『주부들 번개시장 애용』『남편 귀가 길 장보기 늘어』기사가 나가자 왕년에 아내가 몸져누웠던 탓으로 퇴근길에 『딱 한번』 시장에서 생선을 사들고 나오다 동료에게 들킨 일이 있는 편집기자가 다시 시달림을 받기도 했다.

<설사병 된 콜레라>
○…「콜레라」가 때늦게 발생하자 궁리 끝에 『환절기 질병 늘어…음식물 끓여먹어 식중독예방하자』는 기획기사를 만들어 사회면 머리에 실었다. 「콜레라」확산방지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으로 지금도 자평하고 있다.
○…광주사태이후 경제면은 다른 「뉴스」보다 비교적 수월하게 제작될 수 있었다. 계엄령확대조치로 「정치부재」가 됨에 따라 정치 「가십」난인 「중앙탑」이 한동안 지면에서 사라지는 이변이 일어났고 경제기사가 대폭 우대를 받게됐다.
신문은 『거울이라던가….』 깊어진 불황으로 증권 시세가 바닥으로 내려앉아 몇 달째 미동도 않는 상태가 계속되어, 올해 중반부터 증권난이 소리소문도 없이 지면에서 슬그머니 사라졌어도 누구 한 사람 관심을 갖는 사람도 없어졌다.
○…전국민에 충격을 준 사북 사태의 제1신이 3단 짜리 『경찰서장 대기발령』기사였다는 것도「메모」에 남을 만한 일일 것 같다.
공평한 보도를 한다는 생각에서 『경찰「지프」, 광부 치어 자극』이란 표제를 붙였다가「경찰가족」들의 세찬 항의전화를 받기도 했다.
중앙일보 16년 사상 처음으로 1면 광고가 2단이나 올라가 7단이 된 이례도 있었고 편집기자들의 가장 골칫거리였던 각종 사고가·임기응변용으로 애용되는 이변도 잦았다.
○…그렇게도 굵은 「뉴스」가 많았건만 그 중에서도 서해의 작은 섬 안면도의 어느 해안 벼랑에서 숨진 한 집배원의 얘기가 잊혀지지 않는다.
단1장의 신문을 배달하러 험한 10㎞길을 어둠을 뚫고 폭설을 헤치며 헤매다 순직한. 그 참답고 고운 넋. 하마터면 단순사고로 묻혀 버릴 뻔한 그의 부음을 마감 시간을 넘겨 가며 까지 그 비보를 충실하고 돋보이게 처리한 것은 결코 「보람」때문만은 아니었다.

<외신기사 푸대접>
○…집안에 일이 많으면 바깥도 시끄럽게 마련인지 외신면도 평온한 날이 거의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사태(1월1일 2면 3단 『아프간 사태 악화…미 개입검토』)보도로 시작된 올해의 외신 중에서 미 대통령선거와 인질문제, 「이란」, 「이라크」전, 「폴란드」위기, 유가파동, 그리고 중공의 「10악」재판 등이 가장 여러번 「톱」. 혹은 중간을 차지한 주요기사들이었고 5·17직후엔 한·미 관계가, 11월 이후엔 「스즈끼」일 수상의 망언으로 불붙기 시작한 한·일 관계가 외신 면의 대부분을 메웠다.
또 미국의 체면을 먹칠한 채 1년 이상을 끌어오고 있는 「이란」의 인질문제는 양 당사국의 변덕이 심해 「석방임박」제목이 잊을만하면 등장했다.
80년의 외신 면은 각종 주요법안·정치해설·판결문·수사결과 등 「박스」물이 주인 노릇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러는 가운데서도 전화 속을 뚫고 「테헤란」에서 보내온 장두성 특파원의 「이란」, 「이라크」전 상보는 다른 신문을 압도하는 쾌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정치·경제 격동의 여진을 가장 많이 입은 지면은 문화면과 여성면.
문화계 전반이 워낙 침체해 기사 거리가 없던 탓도 있겠지만 한동안 고정란이었던 『세류정담도 개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하는 식으로 변질됐고 3면 외신면과 마찬가지로 각종법안·해설기사가 지면을 침범했다. 독자투고도 정치문제·학원문제 등 거창한 것이 늘었다.
여성면서도 우아한 「패션」기사 등이 사라진 대신 『절약밖에 길이 없다. 한 단계씩 낮춰 살자』는 등의 기사가 뻔질나게 실렸고 한여름 「레저」안내기사도 『차분히 집에서 책을 읽자』는 것으로 나갔다.
『전원에 산다』「시리즈」를 만들 때 그렇게 시골에 묻혀 유유자적할 수 있는 문화인들이 부러웠던 사람은 유독 편집기자만이 었을까?
여담이지만 『새 시대·새 사회』의 물결치는 「슬로건」을 옮기다보니 문선부의 활자량에서 한때 「새」자가동이나 작은 소동을. 벌인 일이 기억에 남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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