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8) 경기 80년-제71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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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35년은 제일고보가 개교35주년을 맞는 해였다. 그동안 31회에 걸쳐 3천여명의 인재를 사회에 배출한 제일고보는 그동안의 업적을 자축하기 위해 성대한 행사를 계획했다.
기념식에 이어 특별전시회, 그리고 대 운동회가 베풀어졌는데 특히 전시회는 모두 20실의 전시실을 마련, 각종 사진·고서·유물·고지도·각종 희귀표본 등이 특별 전시돼 모두 8천명이 넘는 관객이 몰리는 대성황을 보였다(당시 서울인구는 약 50만).
기념식에서 「와다」(화전)교장은 식사를 통해 졸업생 및 재학생 현황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졸업의 횟수를 거듭하기 여기에 31회, 형설의 공을 쌓아 졸업을 필한 자 3천1백여명 가운데 관청근무 3백여명, 교직종사자 1백여명, 실업에 종사하는 자 5백명, 상급학교 재학 4백50명, 기타 8백여명으로 모두 중견으로 사회각층에서 활약하면서…(중략)…해를 거듭함에 따라 생도의 약 8할을 상급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금년(35년)만 해도 모두 1백20명이 상급학교에 진학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과거 35년간 반도교육을 위해 진력한 본교의 업적은 실로 심대하다고….』
앞에서 본대로, 제일고보는 입학도 졸업도 어려운 학교였다.
그러나 다행히 학업을 마친 학생들은 사범과 졸업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상급학교로 진학했다.
예를 들어 1924년 졸업생 93명의 진출을 보면 5년 수료 33명중 26명이 성대 예과, 2명이 경성고공, 4명은 고상, 의전·고농·법전에 각각 지원했고, 구제 4년 수료 32명 중 26명이 사범과 지망, 2명이 의전, 사범과 수료 16명은 모두 교원으로 진출, 그리고 보습과(20년·4년제일때 고교 또는 대학 예과 진학을 위해 설치) 수료생 12명 모두가 성대 예과를 지망함으로써 매우 높은 상급학교 지원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추세는 그후에도 그대로 계속돼 13년 후인 37년의 경우 졸업생 1백34명 중 1백50명이, 그리고 38년에는 1백44명 중 1백34명이 상급학교에 지망하는 높은 지원율을 보였다.
지망뿐 아니라 실제 입학에 있어서도 다른 고보들 보다 월등히 높은 비율을 보여, 예를 들면 24년에 개교한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하는 한국인들 가운데 제일고보 출신은 언제나 다수를 차지했다.
성대는 원래 한국인들의 민립대학설치 운동에 자극돼 일제가 24년에 이 땅에 설치한 학교로 3·1운동을 계기로 세계의 진운을 알게된 우리 민족이 종래의 식민지적 전문학교교육에만 만족할 수 없고 『민족적 자립에 필요한 학술적 근거와 시설확보의 필요』에서 범 민족적 차원의 민립대학을 설치하겠다는 뜻에서 일어난 민중운동을 방해·호도 하려는 기만적 의도에서 설치된 대학이었다.
그래서 교수는 거의 모두가 일인이었고, 모집학생 또한 대다수(7할)가 일인 학생으로 한국인은 대체로 입학정원의 3할 정도만이 입학이 가능했다.
그러나 설립의도야 어떻든 성대는 당시 한국 유일의 대학에 명실공히 한국 내 최고 학부였기 때문에 입학상 여러 제약에도 불구, 한국인 가운데 많은 수재급 학생들이 응시했으며, 제일고보 출신은 한국인 입학생 가운데 대체로 3할을 전후하는 숫자를 차지할 수 있었다.
강성태(17회), 인태직(17회), 김성진(18회), 명왕완(18회), 유진오(20회), 이재학(20회), 홍일용(20회) 등은 성대 제1회 졸업생으로 제일고보의 명성을 떨친 인사들이다.
전문학교(일본의 구제 고등학교), 그리고 31년 만주사변이후 만주에 대거 세워진 각종 고등전문학교에서도 한국인에 대한 차별은 마찬가지였으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제일고보 출신들은 난관을 돌파, 우수한 학교들에 많은 수의 합격자를 냈다.
예를 들어 39년 현재 국내·일본·만주의 41개교에 총 l백55명이 진학하고 있고, 40년에는 50개교에 총 1백51명이 진학하고 있음을 볼 때, 대략 매년 평균 60명 정도의 학생이 상급학교에 진학했음을 알 수 있다.
학생들의 진학열이 이처럼 높았으므로 학교당국에서도 차차 이에 관심을 가져 「학우회지」이외에 『향상』이라는 제목의 진학지도 잡지를 해마다 발행, 여기에 선배들의 수험체험담·상급학교소개·교내모의 시험성적 등을 게재, 재학생들 진학열을 더욱 고취했다.
또 34년부터는 수업연한 1년의 보습과를 따로 설치, 재수생 50여명을 특별 지도하기까지 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진학을 할 수 없는 졸업생에 대해서는 학교측에서 이들 취직을 알선해 줬는데, 제일고보 출신에 대한 좋은 인식 덕으로 대부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취직을 할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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