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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허 스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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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호암 문일평은 이조시대의 명승들을 여러 가지로 분류해가며 소개한 적이 있다.
우선 이 태조 때의 왕사였던 무학은 이승에 낀다. 세조 때의 왕사였던 수미는 그냥 명승이다.
한편 서산대사나 사명당은 걸승에 속한다. 사명당에 대해서는 따로 거승이라는 형용사를 쓰기도 했다.
기승 속에는 당연히 김시습 설잠이 낀다. 그의 의식적인 기항들은 고금을 통해 따를 사람이 없었다.
임진난 때 승군을 일으킨 사명당의 고제인 영규나 각성 등은 의승이라 불렀다. 같은 승군의 장이 된 명조는 동시에 걸승이기도 했다.
이밖에도 학문이 있고 시승과 신승도 있었다. 물론, 요승도 많았다.
이렇게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명승·고승들이 근래에 이르러는 통 볼 수 없게 되었다.
요새처럼 우리네 마음에 등불을 켜 주고 어둔 세상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명승이 아쉬운 때도 드물다.
지난 불교사를 펼쳐봐도 이런 때에는 으레 명문이 나타나곤 했다.
그러나 앞으로도 당분간은 명승이 나타날 조짐은 없다. 참으로 학승이라 할만한 분도 운허 스님 한분 뿐이다.
그분이 어제 자정에 입적했다. 『남에게 알리지 말고 조용히 다비해 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그는 조계종 장례도 마다했다.
아마 명승도 못되면서 사리가 몇 개나 나왔느니 어쩌니 떠들썩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겨서 였는가 보다.
춘원 이광수의 팔촌형이며 독립투사이기도 했던 운허 스님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추악한 승원 정치에 말려들지도 않았고 「매스컴」을 타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그는 가장 순수하게 스님의 스님다운 세계만을 지켜 나갔다. 그리고 말없이 팔만대장경의 번역사업에만 한 평생을 바쳤다.
그가 가장 아낀 경전이 다름 아닌 능가경이었다는게 뭔가 그분의 조용한 인품을 알려주는 것만 같다.
능가경에는 다른 경전처럼 세법이 들어 있지 않다. 그 내용도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명상적이요 철학적이다.
진리란 문자나 말을 떠난데 있다. 따라서 아무리 경전 그 자체가 옳다하더라도 그 자구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게 「능가경」의 이른바 불립문자의 입장이다.
진리란 결국은 이심전심일 수밖에 없다. 말로는 진리며 법은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제자가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그릇이 못 되면 아무리 스승이 커도 소용이 없다.
끝내 운허 스님은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안타깝고 한편으로 송구스런 마음으로 스님을 보낸다.
우리 모르게 밝혀 오던 가장 소중한 등불이 하나 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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