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도시「비엔나」의 멋과 매력|「비엔나·필」을 맞으며 재음미해본다|관능적 도시기질..."출렁대고 이어지는 3박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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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술 하는 사람들에게「파리」라는 어휘가 동경과 향수의 감정을 유발시킨다면 음악 하는 사람들에게는「비엔나」라는 어휘가 그런 감정을 불러온다.
서양음악의 황금시대랄 수 있는 19세기의「비엔나」는 음악적인 매력이 넘치는 멋의 도시였던 것이다.

<「비엔나」는 느껴져야 할 곳>
그러기에 역사에 남는 대 음악가들이「비엔나」로 모여들었고 그 매력과 멋의 포로가 되어 떠날 줄을 몰랐다.
「헝가리」의 명문「에스텔하치」공의 고용악장으로 60평생을 보낸「하이든」도 자유의 몸이 되자「비엔나」로 집을 옮겨 77세의 천수를 다 했다.
「잘즈부르크」태생의「모차르트」역시 26세에「비엔나」로 와서 알찬 창작기의 10년을 보내고 운명했다.「베토벤」은 독일태생임을 잊을 정도로 그의 인생과 활동무대는 「비엔나」를 중심으로 영위되었다.
20대의 청년에서 56세로 생을 마치기까지 35년을 독신으로「비엔나」의 셋방을 전전한 셈이다.
북부의 항도「함부르크」태생인「브람스」역시 64세에 독신으로 운명하기까지 30여 년을「비엔나」에서 생활했다.
무엇이 그들을 사로잡았을까. 그 매력은 무엇일까. 「비엔나」의 멋은 어디서 생길까.
나의 「유럽」기행인 <음악이 만나는 자리>에서 몇 대목을 간추려본다.
「비엔나」는 이해되어야 할 곳이 아니라 느껴져야 할 곳이다.
「유럽」을 석권했던「나폴레옹」이 패망한 뒤 전후처리문제로 이곳에 모인 각 국 대표들이 흐물흐물 녹아버렸던「비엔나」의 매력은「하이든」「모차르트」를 비롯해서 「베토벤」 「브람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타관의 음악가들을 이곳에서 생을 마치도록 했다.

<아름답고 부드러움이 넘쳐>
모나게 사리를 따지기보다 인간적인 본성을 살리고 아름다움에 탐닉할 수 있는「비엔나」의 멋과 문화적 기질이 그들을 사로잡은 것이리라.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부드러운 기질은 때로 꼿꼿한 의지보다 강한 힘일 수 있다.
「나치」에 강점당했던 시기의「비엔나」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남겼다.
마음내키지 않는 근로 봉사에 끌려나온「비엔나」의 시민들은 늑장을 부릴 구실만을 찾는다.
한 사나이가 일손을 멈추고 옆 사람에게 라 기보다는 여럿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한다.
『여보게, 자네 이렇게 큰돌은 본적이 있나?』『아니, 나는 처음 보는걸.』
『암 그렇구 말구, 모두들 이 큰 돌 좀 봐요.』
그러자 모두가 일손을 놓고 모여들어서 웅성거리기만 한다.

<기지로 「나치」우롱하기도>
이렇게 하찮은 돌 하나를 놓고 입방아만 찧고있으니 약이 오른「나치」의 친위대 장교는 부하들을 시켜서 보란듯이 큰돌을 운반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비엔나」의 시민들은 서로 한눈을 찡긋 감아 보이면서 이죽대는 것이다.
『그야, 폭력을 쓴다면 못 해낼 일이 없지.』왕년의 영화로 유명한「부르크」극장 앞을 지나면「루스벨트」의 이름이 붙은 광장이 있다. 「합스부르크」 왕조시대의 「맥시밀리언」 광장이다. 왕조가 붕괴되자 이 당장은「자유의 광장」으로 불리었다.
그리고 「나치」 의 점령 중에는 「히틀러 광장」으로 둔갑했다가 2차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루스벨트 광장」이 된 것이다.
아름다움에 탐닉하면서 이런 적응성이랄까 유연성으로 거듭된 연륜은 적당히 우울하고 적당히 권태롭고 적당히 감미롭고 적당히 관능적인「비엔나」기질을 형성한 것이 아닌가.
그것은 맺고 끊는 2박자가 아닌, 출렁대고 이어지는 3박자일 수밖에 없다. 손을 맞잡으면 흥으로 동화되는 3박자일 수밖에 없다.

<"세사는 금삼척으로 대응">
「비엔나·월츠」가 지닌 세계, 모든 일에 세사는 금삼척으로 대응하는「비엔나」기질이 낳은 세계다.
그러나 양지가 있으면 반드시 음지가 있는 법.「베토벤」이 살아야했던「메테르니히」의 통치는 극단적인 전제정치였다.
세 사람의 신사가 한길에서 나눈 대화도 이튿날아침이면 비밀경찰에게 보고가 될 정도로.
교향곡『운명』을 비롯한「베토벤」의 갈등의 음악은 바로 이런 음지에서 폭발하는 태양을 향한 외침이요, 찬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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