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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마디의 변론-권영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이제 법과대학에 입학함에 있어 이걸 명심하게. 내가 젊고 상대방에 비해 경험도 훨씬 모자랐던 변호사였을 시절엔 당연히 이길 수 있던 사건들에서도 패소를 했었지. 나중 나이 들고 경험이 쌓이자 이젠 응당 져야할 사건들에서도 오히려 승소를 했었네. 그러고 보니 결국 전체적으로는 정의가 실현된 셈일세.』
훗날 변호사로 거의 전설적일 이만큼 대단한 명성을 얻게 되는 「에프·리·베일리」가 학생시절 선배 변호사로부터 받은 책의 겉장에 적힌 글귀다. 얼핏보아서 오히려 당연하기 짝이 없는 말에서 야심 많은 이 학생은 충격을 받게된다. 그래서 실제 죄의 유무보다도 소송의 기술이 판결을 가름하게 되는 게 현실이라면 무언가 달라져야겠다는 문제 의식을 품게 된다.
남다른 노력 끝에 멀지않아 성공적인 변호사로 발돋움하다 보니 바로 「베일리」자신 역시 어느덧 응당 져야할 사건들에서도 이기는 명 변호사가 되어버린다. 따지고 보면 이건 분명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관대한 처분을 바랍니다』이렇게 단 몇 마디의 변론으로 끝을 냈다는 국내 재판사상 이른바 최단 변론사례를 지상에서 읽고 「베일리」변호사를 생각하게 되고 변론에 결코 끝이란 있을 수 없다는 그의 자세 또한 기억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이나 입장을 모르는 터에 경솔히 뭐라 할 수야 없지만 뭔가 개운하게 여기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물론 고작 몇 천원 하는 국선 변호 수임료에 견주어보면 달리 이해할만한 점도 있긴 하겠으나 문제는 변론의 말마디 길이 그 자체보다도 말하자면 변호 포기적인 그 내용에 있다할 것이다.
하기는 「베일리」하면 형사변호사도 하기에 따라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입증시킨 장본인이기도 하고 자신의 고백대로 그 역시 엄청난 수임료를 기대할 수 있는 사건 아니면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직업적 도전을 가능케 할 사건, 이 양단적인 경우를 즐겨 맡는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수임사건의 3할 정도에서는 적자를 보게 되는 모양이다. 기억에도 새로운 「보스턴」의 연쇄교살사건, 「텔리비전」의 연속물 『도망자』로 각색되기도 했던 「샘·셰퍼드」사건, 또는 의사와 연상의 옆집 부인과의 사이에 벌어지는 사랑과 증오의 살인「드라머」「코폴리노」사건 등 집요한 그의 법정 투쟁사에서 이를 보게 된다.
그러나 한편 인권의 절차적 보장이 너무 잘된 「베일리」의 나라에선 진실로 무고한 사람이 무죄로 풀려나기 보다 죄 있는 자가 절차적 보장의 침해를 이유로 무죄 되기 오히려 더 쉬운 전도현상이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 연속된 승소의 영광 뒤에 숨겨진 「베일리」의 고민도 바로 거기에 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그러고 보면 범행을 이미 시인한 피고인에게 『관대한 처분을 바라는』정도의 변론에 대해 우리도 관대하게 봐야될 지 모르겠다. <중앙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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