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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 대신 지휘봉 잡는 '금난새·정명훈 키드' … 젊어진 클래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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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신예 지휘자 안두현씨가 마제스틱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다. 안씨는 지휘 공부를 위해 러시아로 떠났고, 모스크바 필하모닉의 모든 연습·연주를 참관해 감각을 길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005년 11월 한 시립교향악단의 연습실. 앳된 얼굴의 26세 지휘자가 들어섰다. 독일에서 지휘 공부를 마치고 막 귀국한 신참이었다. 아마추어 경험뿐이라 프로 교향악단 앞에 처음 선 그는 긴장했다. 지휘자보다 어린 단원은 몇 안 됐다. 대부분 이모·아버지뻘이었다.

 지휘자는 교향악단을 통솔해야 했다. 하지만 단원들 표정에서 이런 마음을 읽었다. ‘귀여운 지휘자네. 우리가 잘 가르쳐 주자’. 단원들은 심지어 연습 중간에 “이 부분을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된다”거나 “그런 식으로 지휘하면 연주자들이 불편하다”는 조언까지 던졌다.

 젊은 지휘자는 고민했다. 오케스트라를 장악할 것인가, 연습을 원만하게 진행할 것인가. 그는 후자를 택했다. “음악에 대한 내 생각을 나누고, 단원들의 공감을 얻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이 지휘자는 최수열(35)씨.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부지휘자다. 그는 2005년 데뷔 이후 매해 20여 회씩 지휘대에 섰다. 전국의 교향악단에서 객원지휘를 맡았다. 특유의 소통방식으로 단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고, 결국 지난 6월 서울시향의 부지휘자 낙점을 받았다.

 최씨와 같은 젊은 지휘자가 부쩍 많아졌다. 20대에 프로 무대에 데뷔하고, 30대에 교향악단에 자리 잡는 경우가 늘었다. 지휘자 정명훈(61)씨는 한 인터뷰에서 “예순이 돼서야 젊은 지휘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지휘자의 연륜은 중요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최씨와 같은 ‘어린’ 지휘자들이 지휘대에 과감히 오르고 있다.

대표적 30대 지휘자들. 왼쪽부터 최수열 서울시립교향악단 부지휘자, 성시연 경기필하모닉 상임지휘자,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를 거친 아드리엘 김.

 현재 30대 지휘자 층은 유례없이 두텁다. 경기필하모닉 부지휘자 김광현(33)씨, 독일 트리어 시립교향악단 수석상임지휘자 지중배(31)씨, 2012년 독일음악협회가 신예 지휘자 10인으로 선정한 홍석원(32)씨, 2011년까지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에서 부지휘자로 일한 아드리엘 김(38)이 대표적이다. 모스크바 차이콥스키음악원을 졸업하고 국내에서 다양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안두현(32)씨도 젊은 지휘자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의 꿈은 처음부터 지휘자였다. 이전 세대의 지휘자들은 악기 연주로 경력을 시작했다. 독주자 혹은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경험을 쌓은 뒤 40~50대가 되면 지휘봉을 잡았다. 하지만 최근 2030지휘자들은 지휘부터 배운다. 대학 지휘과에 진학하고, 외국 대학에서 지휘로 학위를 받는다.

 이 변화를 보여 주듯 음악대학 지휘과의 입학 경쟁률도 높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지휘과의 2014학년도 입시에는 8명 정원에 30명이 몰렸다. 9년 전인 2005학년도만 해도 같은 정원에 17명이 지원해 경쟁률 2대 1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이미 ‘스타’ 대열에 있는 음악인들도 지휘대에 오른다. 왼쪽부터 정명훈의 막내아들인 지휘자 정민, 피아니스트 김선욱, 런던 필하모닉 단원 김정민, 2007년 지휘 데뷔한 첼리스트 장한나씨.

◆지휘 전공 1세대=젊은 지휘자가 왜 늘었을까. 지휘자 정치용(57)씨는 “인식이 바뀌고 시스템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전엔 지휘가 다른 악기 다 하고 엑스트라로 공부하는 영역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한양대 대학원에 지휘 전공이 생겼고, 93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이어 서울대에 학부 과정이 문을 열었다. 별도의 지휘 공부가 필요하다는 발상이 나온 것이다. 현재 활동하는 30대 지휘자들이 대학에서 지휘를 전공한 1세대다.

 음악대학에 지휘과를 만들려면 우선 오케스트라 단원이 필요하다. 즉 실력 있는 독주자가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 또 연습할 수 있는 공간, 악기·인력과 같은 기반이 필요하다. 따라서 지휘는 비교적 늦게 발전하는 분야다. 지휘로 음악을 시작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는 것을 두고 정치용씨는 “이제 국내에서도 화려한 독주자만 각광받던 시대가 지나가고 오케스트라·합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금난새(67)·정명훈 등 스타 지휘자들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80년대 이후 활발히 활동한 이들을 보고 자란 세대가 2030지휘자로 데뷔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리더십=이 세대에게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의 제왕이 아니다. 협력하고 의견을 나누는 구성원 중 하나다. 젊은 지휘자들은 “한국 오케스트라 지휘가 더 힘들다”고 입을 모은다. 외국에 비해 나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 때문이다. 호칭부터 다르다. 외국 교향악단에서는 나이 많은 단원도 담당한 악기로 호명한다. 한국에서는 존대를 해야 한다. 흔히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이런 관계에서 지휘자가 음악적 지시를 내리기란 힘들다.

 하지만 젊은 지휘자들은 나름의 생존법을 터득하고 있다. 경기필하모닉의 김광현 부지휘자는 “내가 더 어린 건 사실 아닌가. 그걸 인정하고 배울 점은 배운다”며 “무엇보다 나보다 긴 연주 경력에 존경심을 표한다”고 말했다.

 그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에는 내가 배운 모든 것을 보여 주려 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는 그 포부에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이 부분 한 번 더 해봅시다”는 젊은 지휘자에게 “우리 생각에는 잘한 것 같은데요?”라고 대꾸하며 움직이지 않는 오케스트라도 있었다. 요즘 김씨는 “이 부분은 한 번 더 연습해 봐야 퇴근할 수 있겠죠?”라는 식으로 능청스럽게 오케스트라를 이끈다. 그는 “결국 소리 내는 건 단원들이고 나는 동기를 심어 주는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안두현씨 역시 “젊은 지휘자일수록 자신의 실력을 그대로 인정하고 실수했을 땐 솔직하게 시인해야 신뢰를 얻는다”고 말했다.

 ◆깍듯하게, 그러나 만만치 않게=물론 양보만 하지는 않는다. 젊은 지휘자들이 찾은 비결은 실력이다. 젊음이 약점이 될까 하는 절박함으로 악보를 파고든다. 음대 지휘과는 베토벤 교향곡 9개, 브람스 교향곡 4개와 같은 오케스트라 필수곡을 모두 머릿속에 넣도록 가르친다. 이 작품들의 모든 악장을 지휘는 물론 피아노로도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 지휘자들은 실전 연주에서도 악보를 펼치고 작품을 분석한다.

 젊은 지휘자들은 오케스트라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기존에 시도하지 않았던 신선한 작품 연주를 제안한다. 최수열씨는 올해 하반기에 서울시향과 함께할 다양한 작품을 고르는 중이다. 같은 작품이어도 과감한 해석으로 새로운 연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2009년부터 4년간 서울시향 부지휘자를 지낸 성시연(38)씨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성장하며 생동감을 주는 것이 젊은 지휘자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스타 연주자도 지휘대로=다른 한쪽에서는 이미 이름을 알린 30대 음악가들이 지휘봉을 벼르고 있다. 정명훈씨의 아들 민(30)씨는 국내외 다양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타고난 지휘 감각이 있다는 평을 듣는다. 또 피아니스트 김선욱(26)씨는 지난해 영국 왕립음악원 지휘과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휘자를 꿈꿨다.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등을 거쳐 현재 런던 필하모닉 바이올린 주자인 김정민(36)씨도 지휘를 배워 2012년 앙상블 무대에 처음 섰다. 첼리스트 장한나(32)씨는 2007년 지휘자로 데뷔해 카타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맡고 있다.

 이 같은 젊은 지휘자들은 한국 음악계의 미래를 그려 보게 한다. 지휘자 백윤학(39)씨는 “큰 무대, 오케스트라를 책임져 보는 경험을 통해 성장할 세대”라며 “그러나 생각처럼 기회가 많지는 않다”고 말했다. ‘지휘 경험’은 젊은 지휘자들에게 꿈과 같은 말이다. 지휘자는 늘어났지만 오케스트라·무대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최수열씨는 “재주 있는 지휘 전공자가 오케스트라 경험 기회를 얻지 못해 실력이 점점 줄어드는 경우도 많이 봤다”고 안타까워했다. 대부분의 젊은 지휘자가 “나이보다 기회가 문제”라고 말하는 이유다.

글=김호정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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