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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육사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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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전두환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전역사의 첫머리에서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하겠다』는 자신의 가치관과 소신이 육사시절에 이룩된 것이며 그것은 지금도 자신의 행동과 사고를 좌우하는 특징적 요소라고 말했다.
아직은 일반국민이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는 전대통령의 「리더십」이나 우리사회에서 가장 현대화된 거대한 조직인 군부의 실상을 파악하는데는 4년 제 정규1기(11기)들로부터 시작된 육군사관학교 교육의 본질과 그후 그들이 겪어 나온 사회적 경험들을 통찰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전대통령은 육사입교 때를 회고,『6·25 동란으로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해있던 때』라고 했다. 4년 제 육사의 설치령이 내려진 51년 10월은 1·4후퇴를 전후한 치열한 공방이 끝나고 전방이 현 휴전선으로 거의 고착화했을 무렵이었다.
당시 이승만대통령은「쁘·플리트」미8군사령관에게 『한국군이 제대로 발전하려면 이제부터 군 간부를 양성해야겠는데 원조로 전쟁을 치르고있는 터에 독자적으로 사관학교를 세우는 것이 무리이니 협조해달라』고했다.
「밴·플리트」장군이 어찌나 쾌히 승낙했던지 이대통령은 그후 육사생도들에게 『영원히 「밴·플리트」장군의 은혜를 잊지 말라』며 자신이 직접 자리를 선정해 장군의 동상을 세우게 했다.

<입시 경쟁율 16대1 기록>
임시교지를 진해로 잡은 육사는 곧 전군부대와 대구·부산 등지에 신입생모집공고를 냈다. 당시 대학진학 연령층에 있었던 중학 5,6학년생의 대부분은 학도의용군 징집대장이었거나 이미 사병으로 입대해 일선부대에 배치돼있었다.
다만 적 치하에 들어간 적이 없었던 대구·부산지역학생만이 일부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전대통령은 군인이 되기 위해 때마침 거리마다 나붙은 육사모집광고를 보고 응시를 결심했다.
서울·대구·부산· 일선 등지에서 실시된 시험은 16대1의 경쟁률을 보였다.
이렇게 해서 선발된 육사 11기생 2백 여명은 52년1월1일자로 진해 교사에 입교해 2O일간의 예비훈련을 받은 다음 52년1월20일 입학식을 가졌다.
초대교장 안춘생 장군은 안중근 의사의 종질이자 중국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 전형적인 찬백무인 이었다. 생도대장은 이승우 중령(육사5기·일본군 출신), 교수부장은 박중윤 중령(현서울시립산업대학장), 그밖에 최윤직(수학), 황찬호(영어), 이기백(역사), 변대섭(국사), 조순 (경제학) 씨 등이 교관이었다.
『무슨 일에든 항상 우리가 제일 먼저 부딪친다』는 정규 1기생(11기)의 숙명적 「프런티어」교육이 시작됐다. 이들에겐 4년 내내 상급생에게서 물려받을 교과서도 없었다.
전대통령은 전 역사에서『정규육사는 완벽한 민주적 교육제도하에서 사관생도를 가르쳤고 젊은 사관생도들은 우리 나라 어느 계층보다 민주적 생활규범과 윤리를 체험을 통해 체득했다』고 말했다. 11기생들은 미육사「웨스트·포인트」의 「커리큘럼」과 생도규율을 그대로 옮겨온 가운데 생활했다.
겨울에는 모두 동상 걸려
교수 부는 최초의 학사군인을 비축한다는 긍지에서 일일시험제도·자습·토론위주의 강의를 구사해 67점 이하는 무조건 퇴교시켰다. 내무생활에서는 자기의 생활실태와 품성상의 결함이 철저하게 파헤쳐져 이것이 벌점으로 공시되었다.
시험을 위주로 하는 교육이 성공하려면「명예제도」의 전통이 수립되어야한다. 「커닝」·거짓말·절취, 그리고 이것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는 것은 명예로운 언동이 아니라는 부동의 가치관이 심어졌다. 그리고는 모든 사고의 방향은「국가·민족」「파사현정」「국가의 간성」「정규사관」「사생관」이란 단어에 초점을 맞추도록 훈련되었다.
생도들은 당시 다른 국민이나 마찬가지로 극도의 궁핍 속에서 야수와 같은 군사훈련을 받아야했다. 전생도가 겨울이면 동상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식사는 소금국에 꽁보리밥이 고작이었다.
학교간부는 물론 미군사고문단도 급식 문제를 크게 걱정했으나 현실과 엄청난 차이가 있는 규칙이지만 육사가 이를 안 지키면 누가 지키겠느냐고 해 편법에 의한 수혜를 거부했다.
육사는 한국의 도덕의 고도
이 같은 역경을 극복한 것은 앞으로「사회의 소금」으로서 자신들이 맡을 역할에 대한 열광적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주한미대사관의 한 문정관이 후일 쓴 그의 저술에서『육사는 한국에 있어 도덕의 고도』라고 말했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전대통령의 등장과 그를 통한 새 가치관의 구현은 이 같은 「메커니즘」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같은 내무반에서 육사시절을 지낸 강재륜씨(50)는 그때 보여준 전대통령의 행상과 지도자로서의 싹을 이렇게 설명했다.
『육사1,2학년 때 학교생활이 주는 정신적·육체적 고통 때문에 자퇴를 한두 번 생각 안 해본 사람이 드물었다. 내무반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매마다 전대통령은「우리의 가는 길이 최고의 길」이라며 급우를 격려했다. 그는 목표가 서면 과정에서 비관하는 법이 없었다. 또 그는 굉장히 강건하고 부지런했다.
동기생 중 제일 키가 작았던 김모(대령)가 같은 내무반이었는데 구보 때는 으례 전대통령이 총 두 개를 메고 뛰었다. 전대통령은 행동이 민첩해 기상에서부터 수업시간까지 내무반에서 치르는 전과정을 언제나 제일 먼저 끝냈다.
남는 시간은 솔선해서 내무반 청소를 해 동료들이 미안해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진실로 한 인간으로서 매력 있고 인정 있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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