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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주문의 허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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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계약결혼한 평범녀·재벌2세 커플의 로맨스 ‘운명처럼 널 사랑해’(MBC). 여주인공 김미영(장나라)은 대형 로펌의 비정규직 사원이다. 별명이 ‘포스트잇 아가씨’다. 온몸에 자기에게 주어진 잡무의 내용을 적은 포스트잇을 덕지덕지 붙이고 다녀서다. 별명처럼 그녀를 하찮게 대하는 바람둥이 변호사에게 모욕당하는 순간 나타난 재벌 2세(장혁)는 “당신은 더 이상 아무나 붙였다 뗐다 할 수 있는 포스트잇이 아니라 강력 본드”라고 말하며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그녀의 대척점에 있는 또 다른 비정규직 캐릭터가 지난해 KBS 드라마 ‘직장의 신’의 미스김(김혜수)이다. 포스트잇 폭탄 정도는 비교 안 될 정도의 업무가 몰려오지만 척척 해낸다. 자발적 비정규직인 그녀는 호치키스 찍기, 복사와 수납 같은 단순 업무를 기막히게 해내는 프로페셔널, 잡무의 달인으로 존중받는다. 심지어 노래방 탬버린 치는 기술까지도 ‘아트’다.

 일본 칼럼니스트 미야 도쿠미쓰는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주문의 허구’라는 글에서 현대 직업 선택의 신조가 된 ‘네가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이 사실은 가장 우아한 반노동적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한 바 있다.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명제가 “인간의 노동을 사랑할 만한 일(창의적이고 지적이며 사회적으로 유망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반복적이고 다른 직업과 뚜렷한 구분 없는 단순노동)로 계층화하며, 전자를 특권화한다”는 것이다. 네 피를 끓게 하는 일을 하라, 꿈을 쫓아라, 열정을 불살라라고 말하는 것은 동시에 “사랑할 수 없지만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들, 즉 대부분의 노동을 우리의 의식에서 추방한다.”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주문은 또 IT나 미디어, 문화와 패션 등 이른바 창조적이고 멋진 직업군에서 종종 일어나는 저임금이나 노동착취를 은폐하는 구실이 되기도 한다. 사랑과 열정의 대상이니 얼마든지 무급을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다.

 사실 내가 하는 일이 사랑할 만한 일인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직장의 신’ 미스김이 청소나 정리 같은 단순·육체 노동도 창의적으로 하면 예술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사랑받을 일과 사랑받지 못할 일, 그래서 가치 있는 일과 가치 없는 일은 따로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사랑받을 사람과 사랑받지 못할 사람이 따로 있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 아니, ‘당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라!’ ‘당신의 일을 사랑스럽게 만들어라!’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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