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사 발표 김대중 등 내란 음모 사건 수사결과 전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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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계엄사령부는 7윌4일 김대중과 그의 추종분자일당이 획책하여온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수사를 일단락 짓고 김대중을 비롯한 37명을 우선 내란음모, 국가보안법, 반공법, 외국환관리법 및 계엄포고령 위반 등 혐의로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 부에 구속 송치할 방침이다.
이와 동시에 이용희·장을병·송창달·김재위·이현배·김승동·함세웅·김동길·이영고 등 수사과정에서 자수한자, 전비를 뉘우치고 수사에 적극 협조한 자, 그리고 범죄사실이 경미한 부화전동자 등은 개과천선의 기회를 주어 국민적 화합에 기여케 하기 위하여 사법조치를 유보하고 경고훈방 등의 조치를 취한 바 있다.
계엄사 합동수사당국은 지난 5월22일 김대중에 대한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한 이후 계속 김대중과 추종분자일당의 내란음모 혐의에 대해 집중적으로 수사를 진행하여 왔다. 그 결과 이른바 김대중과 추종분자 일당들이 「국민연합」을 주축, 전위세력으로 하여 방대한 사조직을 형성. 주로 복학생을 행동대원으로 내세워 대중선동에 의해 학원소요사태를 일으키고 이를 폭력화하여 전국 일제히 민중봉기를 일으킴으로써 유혈혁명사태를 유발. 현정부를 폭력으로 전복, 타도한 후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권을 수립, 집권하려는 내란음모행위의 전모가 이번 수사과정에서 밝혀지게 되었다. 이밖에도 김대중은 반 국가단체인 재일 한민통을 발기, 조직, 구성하여 그 수뇌(의장)로 있으면서 북괴노선을 지지, 동조하는 등 반국가적 행위를 자행하고, 외국으로부터 불법 반입한 외화를 불법소지, 사용하였으며 계엄포고령을 공공연히 의도적으로 위반한 협의사실도 아울러 밝혀 내었는데 수사결과 전모는 다음과 같다.

<4단계로 나눠 내란음모활동>
1, 동기 및 목요
◇김대중은 10·26사태발생이 자신의 집권을 위한 절호의 기회와 여건의 내도로 확신하고 신민당 복당을 위한 합법적 집권투쟁과 사조직을 통한 대중선동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비합법투쟁의 양면전략을 추진하여 현정부를 상대로 한 복권투쟁에서는 일단 성공하였으나, 신민당 내 당권투쟁에서는 당권파의 완강한 저항으로 열세에 몰려 자신의 뜻대로 집권기반을 확보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케 되었다. 이에 김대중은 신민당과 결별하고 사조직의 확대와 선동 조종에 의하여 폭력적 극한 상황을 유발함으로써 현정부를 전복시키는 것만이 집권에의 필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김대중은 이상과 같은 동기아래 (학생선동) - (대중규합)-(민중봉기)-(정부전복)을 투쟁목표로 삼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합법 투쟁을 추구, 마침내는 내란선동과 음모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2, 투쟁방법
김대중은 자신의 계획실현을 위한 투쟁방법으로서
◇조직확대를 위하여 「국민연합」 등 재야세력을 사 조직화하고 추종세력을 광범하게 규합, 지지기반을 확대하며 ◇학생·근로자 등 대중선동을 위하여 허위날조 된 유언비어와 선동 술로 대 정부투쟁의식을 마취하면서 불신풍조를 심화시키고
◇학원소요를 유발코자 학원자율화 「무드」에 편승하여 복학생을 포섭, 소요사태를 격화시켜 대 정부투쟁으로 유도하고
◇이를 민중봉기로 유도하기 위해 학생소요사태를 유혈 폭력화하여 사회혼란을 극대화시키고, 전국 일제히 민중봉기를 일으키도록 배후 조종하여
◇정부전복을 위한 유혈혁명사태로 발전시켜 정부기능을 마비시킨 다음
◇정권장악의 단계에서는 자신이 대통령에 추대되고 자신의 추종분자로 구성된 과도정권을 수립, 집권한다는 구체적이며 치밀한 계획과 방법을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3,내란음모활동 개요
김대중의 비합법투쟁을 통한 내란음모활동은 「복권투쟁」 단계를 거쳐 「당권투쟁」 단계에서부터 본격화하여 「탈권투쟁과 집권투쟁」을 합병, 추진하는 4개 단계로 구성되어 있는바, 5·17 조치 이후의 광주사태와 최근에까지 계속되고있는 잔당들의 봉기 기도를 포함한 내란음모활동개요는 다음과 같다.
가, 복권투쟁단계 (제1단계)
◇김대중은 자신의 집권기반을 위한 여건조성에서 우선 복권을 실현시켜야만 정치활동을 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80년2월초 신민당 내 추종분자인 박영연·조윤형·이용희 등에게 자신의 복권이 빨리 실현되도록 당내에 복권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조직적인 활동으로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국민여론을 환기시킬 것을 지시하여 신민당 복권투쟁위원회를 구성케 하였고, 이들로 하여금 정부에 대하여 복권조치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케 하였다.
◇또한 김대중은 2월16일 윤보선 가에서 예춘호·서남동·문탄환·이문영·고은(본명‥고은태) 등 측근심복과 심재권 (서울대복학생), 서경석 (도산계교모협총무)등과 불법 집회하여 자신의 복권을 위해 투쟁한다는 결의를 하게 하는 등 복권투쟁에 주력하는 한편, 광범한 사조직 확대를 위해 해직교수와 체적학생들을 중점적으로 포섭 편입시켜 다가오는 대학개학에 대비하는 태세를 정비하였다.
나, 당권투쟁단계 (제2단계)
◇김대중은 2월29일 복권이 이루어진 이후 신민당이 자칭 수권정당임을 내세워 국민적 호응을 유도하고 있는데 편승하여 당내에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을 포섭 확대함으로써 정권투쟁을 전개할 것을 목표로 적극적인 당권투쟁을 개시하였는데, 신민당 내 김대중 계인 예춘호를 비롯한 송원영·우승환·정대철·이룡희·조세형 등으로 하여금 전국지구당위원강의 포섭을 추진케 하는 한편, 신민당의 원내외 핵심세력을 자신의 추종세력화 하는데 전력을 경주하였다.
◇이와 같은 김대중의 신민당 내 원내외 세력 번식에 당황한 당권파의 격렬한 반발과 저항으로 양파간의 치열한 당권투쟁이 유발되었으나 김대중은 원내의원 27명과 원외세력의 60%를 확보하여 자신의 양면전략 추진 상 신민당당권탈취가 무난히 이루어짐으로써 신민당을 기반으로 한 정권장악목표가 달성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원내의원 포섭을 위해 예춘호에게 1,000만원, 원외세력포섭을 위해 이용희에게 1,100만원을 지급하는 외에 무수한 향응과 매수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살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초 기대와는 달리 추종세력이 당권파에 비해 열세일 뿐 아니라 정치적 명분상으로도 떳떳치 못한 궁지에 몰리게되자 김대중은 3월27일 박영연 이용희 등 27명의 추종 국회의원과 측근참모전원을 동교동자택에 소집하여 향후 자신의 집권투쟁 전략방향을 논의, 이들로부터 당에 복귀해도 승산이 없다는 분석보고를 받고 사실상 신민당 당권투쟁을 포기, 또 하나의 사조직중심 집권투쟁전략을 추진하기로 방향을 전환하고 원내기반확보를 위해 자파계 소속의원 전원으로 소위신민당의원 시국간담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다. 집권 및 집권투쟁단계 (제3단계)
◇신민당 당권투쟁을 일면 추진하면서 사조직 중심의 비합법 집권투쟁 전략도 추진해오던 김대중은 당권투쟁을 포기하기 전부터 사조직의 확대와 대중선동에 주력하여 왔던 바, 결정적으로 신민당 당권투쟁을 포기할 것을 선언한 4월7일의 대 신민당 결별선언을 계기로 탈권투쟁과 집권투쟁을 병합하여 본격화한 것이다.
◇김대중은 79년12월8일 연금해제와 동시에 정귄장악의 기반조성을 위한 사조직으로서▲작년12월7일∼금년 4월초간 각 대학 전·현직 학생회장단 및 석방학생과 제적생 등을 청년조직인 민주연합 청년 동지회를 강남 김홍일로 하여금 조직케 하여 이들을 자신의 전위조직으로 학원 내에 침투시켰는데 거의 전원이 복학생인 이들 회원은 무려 4백 명에 달하며
▲80년1월 하순∼3월10일간 전직 국회의원 및 공무원·교수·재야법조인을 중점 포섭하여 외곽전위대로 활용키 위해 심복인 김종완으로 하여금 「민주헌정동지회」를 조직케 하였는데 회원은 전국에 걸쳐 2만여 명이며
▲80년 3월 중순 20대에서 40대의 청장년 정치지망생들을 전국 시·군단위로 포섭, 김대중 추종분자로 양성하고 조직을 통한 선동활동을 위해 심복 김상신으로 하여금 「한국정치문화연구소」를 조직하였는데 전국 시·군에 회원 5천명 등 전위조직을 다양하게 분산 조직하면서 학생과 대중 선동을 전개하였다.
◇김대중은 이와 같은 전위사조직을 바탕으로 하여 대중선동을 획책하는 한편, 4월7일 대 신민당 결별선언을 계기로 집권기반의 중추적 핵심기구로서 윤보선이 중심이 되어 온 「국민연합」을 탈취, 자기 지배하에 두기 위해 4월10일 공동의장인 윤보선 성금헌이 국민연합을 특정개인의 집권목적을 위해 악용할 수 없다고 완강히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심복추종분자 문우환·예춘호·이문영‥고은태 등으로 하여금 조직을 개편케 하여 중앙위·중앙상위·집행부의 전 부서를 자파계 복직교수·복학생으로 충당함으로써 학원소요사태의 배후조종을 통한 폭력화와 민중봉기를 위한 선동· 조종의 중추적 사령탑 기능을 담당케 하였다.
,◇사조직과 지지세력기반의 전국적 확대를 달성한 김대중은 3월26일 YWCA수요강좌를 시발로 하여 대중선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면서 4월16일 한신대, 4월18일 동국대에서의 불법적 정치선동연설에 깡패를 조종하여 청중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고 군중사이에 박수부대를 배치, 선동케 하면서 『민주주의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등 격렬한 구호로 대 정부투쟁을 선동하는 한편, 복권전인 2월 12일부터 4월 28일 사이에는 전국 각 대학의 복학생회 간부와 총 학생회장 등 간부학생인 심재철(서울대)·정간년(전남대)·이승정(한신대)·조태원(부산대) 등 4백인여명을 동교동 자가를 방문케 하여 대 정부투쟁 의식을 고취하고 자신의 집권을 위해 궐기하여 정부를 타도할 것을 선동하면서 활동자금과 함께 김대중초상이 양각된 「메달」 (신표) 을 직접 수여하는가 하면, 이름이 새겨진 「볼펜」 · 「사인」이 든 사진과 선전책자·선동 문건 등을 주고 정원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등 철저한 심복행동대원을 만드는데 주력하였다.
◇이와 함께 김대중은 복권 후부터 측근 심복과 참모들로 비서실(실장 예춘호)경호실(실장 박성철)을 두고 정치·정책·섭외·공보·의전 등 각 비서와 대변인 그리고 30여명의 경호원을 포함하는 방대한 조직을 두어 외출시에는 마치 일국의 국가원수가 거동하는 듯한 작태를 연출하였으며, 정책자문기구인 「정책연구실」(실장 이문영)을 두어 정세판단 및 단계적 학생시위구호와 방법의 안출, 선동연설문과 선전책자의 작성 등 실질적인 집권자연한 「브레인」역할을 수행케 하였다. 이밖에 전투적 행동대인 민주연합청년동지회(지휘 총책 김홍일·회장 송창달)를 직계 하에 두어 각 대학에 침투하여 복학생을 중심으로 한 각 대학 시위 주동자를 배후 조종케 하였다.
◇탈권투쟁 단계에서의 태세정비를 완료한 김대중은 3월중순경부터 각 대학에서 일기 시작한 학원자율화의 열기가 점차 과열되고 3월17일 성균관대를 비롯한 서강대·연세대·서울대 등 각 대학에 병영집체교육거부시위 및 농성이 번져 가는 것을 보고, 이러한 학원시위를 소요사태로 유도, 폭력화시켜 사회혼란과 민중봉기에 의한 정부전복목적에 이용할 것을 결심, 이것을 집권투쟁과 병합하여 추진하기로 전략을 세우고 실천하였다.
학생대표 불러 「반정부」선동
◇김대중은 각 대학에 침투시켜놓은 복직교수와 복학생을 통해 총학생회장을 비롯한 「데모」주동자들을 수시 배후조종, 학원사태의 악화조장과 과열화를 꾀하면서 학원소요사태를 직접 대 정부투쟁으로 전환시킬 기회를 노려오다가 4월29일 윤봉길의사 추모제 참석 차 내려간 충남예산군 덕산 현지에서 이른바 민주회복을 위해서는 계엄해제·정부개헌작업포기·정치일정단축·연내 정권이양을 촉진시켜야하며 그 방법으로서 국민연합을 주축으로 한 「민주화촉진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제창, 이를 뒷받침 위해 5월1일 자가에 심복인 국민연합중앙상위위원장 문철환을 비롯한 상임위원 이문영·고은태·예춘호·한완상과 중앙위원인 서울대 복학생리지배 (사무국장), 장기표 (조직국장), 심재권(홍보국장)과 고대 복학생 조성우(기획국장) 등을 소집, 학원「데모」의 폭력화와 이의 민중봉기 확대를 통한 정부전복을 모의하고 정부전복 시 정권을 즉시 인수하여 집권할 수 있는 과도정부기구로서 「민주제도연구소」를 결성, 분야별로 심복을 배치하는 한편 「데모」폭력화 조종 및 동원 책으로 조계우·심재권 등을 임명하여 「민주청년협의회」(복학생조직)를 중심으로 한 각 대학 복학생회와 총학생회로 하여금 폭력시위를 일제히 감행토록 조치하였고, 5월7일 이른바「민주화 촉진 국민선언」을 발표함으로써 학원소요사태를 학내문제로부터 학원 외 정치 「이슈」로 급선회시키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뒤이어 5월8일12시 강남 「터미널」옆 경양식집 「애천」에서 복학생 조계우는 이신범(서울대복학생), 문국주 (서울대복학생) 등 각 대학 복학생회 대표들을 소집, 국민연합을 주축으로 하여 김대중을 대통령에 옹립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폭력시위를 격화시켜 유혈사태로 발전시켜야 하며, 이를 위해 각목·화염병·흉기를 준비, 정부청사를 공격, 점거하게되면 유약해진 경찰은 패퇴하게되고 군과 유혈충돌이 불가피해질 것이고 민중이 흥분, 호응하여 합세하게되면 군도 무력해질 것이고, 정부를 쉽게 전복시킬 수 있으니 각 대학을 책임지고 폭력시위를 감행할 것을 지령, 모의하였다. 이들은 5월12일 「파크·호텔」501호실에서 김대중에게 지난 5월8일로 실행하여 성사시킬 것을 당부, 격려하였다.
◇한편 김대중의 심복인 국민연합중앙상위원 고은태는 3월20일과 5월5일 자가에서 중앙대복학생 송기원에게 김대중으로부터 수령한 50만원의 「데모」자금을 주면서 『이제 정권은 우리 목전에 다가왔다』고 선동하고 정부타도를 위해 학생이 선봉에 서서 민중봉기를 조성토록 지령하면서
▲김대중이 집권하면 문교부검열관직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등 학생폭력시위를 배후 조종하였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학원 「데모」폭력화를 위한 배후조종에 의해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 대학의 소요사태는 격화일로를 치달아 마침내 13일부터의 가두진출과 5월14일, 15일 양일에 걸친 서울일원의 극한적 폭력시위 사태로 발전하여 국가안보와 국민생활을 위협하는 국가적 위기로까지 몰고 갔던 것이며 막대한 인명과 장비 및 재산상의 손실을 초래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특히 학원소요사태를 가두 폭력시위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김대중은 계속 「데모」현장에 측근 심복을 파견, 격려하는 동시에 진행과정을 보고토록 하여 파악된 상황에 따라 새로운 구호와 지령을 내리는 등 치밀하고 주도하게 가두시위 폭력화를 배후 조종하였으며, 학생소요의 폭력화를 민중봉기로 연결시킬 경우, 자신의 집권은 머지 않아 달성될 것이라는 망상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에 김대중은 5월15일 예춘호·문탄환·이문영둠측근 심복들올 소집하여 내란 결행의 마지막 계획을 수립하였다. 즉 이들은 5월7일 김대중이 발표한 민주화촉진 국민선언에서 요구한 바 있는 비상계엄해제, 특정인 퇴진 등이 5월 19일까지 관철 않을 때에는 5월20일 정오를 기해 일제 민중봉기를 통한 대 정부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으나 김대중은 김재규 현 확정파 임시국회 개회, 그리고 학원소요 폭력화조종 등 여러 요소를 감안하여 보다 성숙된 폭력혁명사태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5월22일이 더 유리할 것으로 판단, 결행 일을 변경하였다.
◇이와 같이 결행 일을 변경한 김대중은 이 사실을 5월16∼17일간에 이화여대에 집결하여「디·데이」를 5월2O일로 알고 향후 투쟁방안을 논의하고 있는 전국 각 대학 학생회장단에 심재권을 대표로 보내어 통고하고 자신의 계획대로 학원사태를 발전시킬 것을 지령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김대중은 5월22일 정오를 기해 서울에서는 장충공원, 지방에서는 시청 앞 광장에서 「민주화촉진선언 국민대회」를 일제히 개최하기로 하였으며 특히 선동적 효과를 올리기 위해 참석하는 시민들은 동참의 뜻으로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국민연합중앙위원들은 수의를 입고 집결, 도보행진으로 「데모」에 합류하여 이를 계기로 민중봉기를 야기케 해서 다중의 힘으로 정부기능을 마비시켜 정부를 전복, 집권한다는 음모를 꾸민 것이다.

<지하잠입, 제2 광주사태 종용>
라, 광주사태발전 배후조종
◇김대중은 이밖에도 우리 민족사상 그 유례가 드문 일대 국가적 불상사였던 광주사대의 발단도 배후 조종하였음이 밝혀졌다. 김대중은 전남대 복학생인 정동년이 4월12일 자신을 방문하였을 때, 광주지역 대학생 「데모」상황을 논의하고 민주회복을 위해 계속 투쟁하라고 격려하면서 방문기념 「볼펜」을 주어 하향시켰으며, 그 후 5월5일 정동년이 다시 심복 김상현(한국정치문화연구소장)과 함께 김대중 가를 방문하였을 때 광주지역 학생 「데모」자금으로 5백만 원의 자금지원을 요청하자 우선 1차로 3백만 원을 주었고, 2차로 5월8일 2백만 원을 주는 등 5백만 원을 「데모」자금으로 주었다.
김대중은 정동년에게 5백만 원의 자금을 주면서 「김대중 납치사건 범행자리스트」를 비롯한 자신의 저서와 선전책자·선동 문건 등을 전남대와 조선대에 배포하고 계엄해제, 이원집정부 개헌반대, 정치일정 단축 등을 「이슈」로 대 정부 투쟁을 전개할 것을 교사, 선동하였다. 정동년은 김대중지시에 따라 광주에 내려가 5월6일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뢰에게 2백70만원을, 5윌10일 조선대 「데모」책 윤한봉(전남대복학생)에게 1백7O만원을 각각 「데모」자금으로 주어 5월18일 광주사태의 발단을 이루었던 전남대 가두시위를 배후 조종하였고, 뒤이어 조선대학생들도 전남대 가두시위에 합세, 광주사태를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게 한 것이다.
◇김대중의 광주 현지 사조직인 폭력전과자 김봉수(전남영암거주)와 김유곤(해남거주) 등 10여명은 복면폭도로 활동하여 탈취한 화물차에 「김대중 석방하라」는 「플래카드」를 부착하고 거리를 질주하면서 폭동을 가열케 하는 데도 작용하였다. 이들은 계엄군의 진입기미가 보이자 탈취한 「카빈」과 실탄을 광주태봉산록에 은닉해 둔 채 5월28일 광주를 탈출하여 서울로 잠입, 마포소재 무허가 하숙집에 은신한 후 서울시내 동조 깡패들과 합류하여 제2의 광주사태를 야기코자 암약하다가 일당7명이 검거되었다. 이중 김유곤은 김대중이 집권하게 되면 지방 우체국 장을 시켜준다는 보장 하에 폭동에 가담하였다고 진술하고있다.
◇또한 김대중의 사조직인 전남해남출신 최덕길은 광주거주 사조직 10여명을 동원, 「데모」군중 속에 잠입 시켜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놈 씨를 말리러 왔다』『여자의 유방을 칼로 난도 하였다』『계엄군이 「데모」군중 2백∼3백 명을 죽였다』는 등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유언비어를 날조, 「데모」군중들에게 유포시켜 흥분한 시민을 가세케 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김대중의 외곽전위조직인 민주헌정동지회 전남도책인 변호사 홍남정은 2월29일∼5월초순간에 전후 5회에 걸쳐 김대중으로부터 전남지역 조직 확대지시와 함께 30만원의 격려금을 받아 3백여 명을 포섭, 입회시키는 한편, 전남대 복학생 김운기 (경영2) 에게 김대중으로부터 받은 「김대중 납치사건 범행자리스트」등 선동유인물을 살포케 하는 등 학생시위를 배후 조종하였다. 뿐만 아니라 광주사태가 최악의 상태로 악화되어 폭도들이 도청을 점거하자 5월23일∼26일간 시민수습책위원회라는 구실로 도청을 출입하면서 투쟁비 명목으로 1백만 원을 폭도들에게 지원하고 『무기를 절대로 반납치 말고 투쟁을 계속하라』고 격려하는 등 배후 조종하였다.
마, 지하잠입 잔당의 봉기획책 계속
◇한편 김대중의 지령에 따라 5월22일 전국 일제민중봉기를 획책하다가 5·17조치로 무산되자 지하로 잠입한 각 대학 김대중 추종 복학생들은 조성우(민청협회장·국민연합중앙위원회기획국장)와 이신범(서울대 법4·복학생) 의 조종 하에 이해찬 (서울대) 등 10여명이 주동되어
▲5월19일∼6월12일간 전후 16회에 걸쳐 은밀히 회합하면서 서울에서 제2의 광주사태를 유발할 목적으로 각종 선동 유인물을 제작 살포하는 동시에
▲화염병과 「대침」(일종의 독침)을 제작소지하고 다니면서 복학생을 규합, 특공대를 조직하여 6월12일 구로 공단에서 1차 폭력시위를 일으켜 근로자를 선동, 동원함으로써
▲그 여세를 몰아 6윌13일18시 화염병 투척을 신호로 화신 앞 등 시내중심 가에서 일제 폭력시위를 감행하여 계엄군과의 충돌을 일으키고 사태를 악화시켜 정부기능을 마비, 전복해 보려고 기도하다 거사직전 일망타진되었다.
바. 결론
◇이상의 내란음모행위 수사결과를 통해 김대중이 단계적인 집권투쟁목표를 설정하고 합법·비합법 투쟁의 양면 전략 하에 먼저 복권투쟁단계를 성공시켜, 합법적 정치투쟁기반을 마련한 다음 신민당 복귀를 위한 당권투쟁을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민당이 외부 열 입자인 김대중에게 조직기반을 내어 주려하지 않았고, 또한 김대중의 파렴치한 정치적 야욕추구작태가 명분상 용납될 수 없게 되자, 김대중은 당권투쟁을 포기하고 신민당에 일방적 결별선언을 한 것을 계기로 사조직과 선동에 의한 비합법 탈권투쟁에 주력하게 된 것이며, 국민연합을 주축으로 한 잡다한 사조직을 대중선동과 민중봉기에 이용하는데 중점을 두어 조직 배치하였다,
◇이와 같은 바탕 위에서 김대중은 민중봉기의 기폭제가 되어 유혈폭력사태를 야기하는 데에는 학생시위를 폭력화하여 무정부상태로 유도하는 길이 유일한 방도라고 판단, 복직교수와 각 대학 복학생을 중심으로 사조직을 다양하게 분산, 설립하여 각대학내에 추종분자를 침투시키고 학생소요사태를 배후조종하고 시위사태의 가두진출·폭력화를 유도하였으며, 현정부의 합헌성과 정부의 정치일정 추진공약에 대하여 조작된 유언비어유포 및 해괴한 선동 술로 국민으로부터 불신 받게 하는 데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김대중은 학생들의 시위와 구호를 자신의 투쟁단계에 맞추어 조정, 지시하면서 국가안보와 정치, 사회적 안정의 최후보루인 군을 국민과 이간시키고, 국민의 불신과 비판의 대상이 되도록 하기 위해 온갖 음모와 낭설을 날조 선동하는 동시에 학생시위의 주장과 구호도 정부와 군을 국민과 이간시키는데 중점을 두어 조작 지령하였다.
◇이러한 김대중의 전략에 따라 각 대학의 소요사태는 배후 조종자인 김대중의 의도대로 점차 가열화 하여 비상계엄 하임에도 불구하고 마침내는 5월13일부터 가두에 진출, 서울일원과 전국각지에서 5월14, 15 양일에는 극한적 폭력사태로 발전하여 도시기능과 질서를 마비시키고 국가 공권력에 정면으로 도전, 무정부상태를 방불케 하는 국가적 위기를 조성하고 말았던 것이다.
만약 정부와 계엄당국이 5·17조치를 신속히 단행치 않았더라면 김대중의 계획대로 학생폭력사태를 계기로 하여 기만적 수법과 공산당 식 선동에 의한 민중봉기로 유혈사태를 초래, 일대 국가적 위기에 직면할 뻔하였던 것이다.
◇김대중은 탈권투쟁과 집권투쟁을 병합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조직으로 구성된 과도정권구상까지 준비하여 정부를 전복시켜 탈권이 성공되면 즉시 정권을 인수, 집권하려는 만반의 태세까지 갖추어 놓고 있었음도 밝혀졌다.
그뿐만 아니라 동일인 심복을 분산된 여러 조직에 중복 배치하여 각기 다른 포섭대상과 배후 조종 계통을 관장케 합으로써 광범하고 방대한 듯이 외형적 위세를 과시하고 추종분자들에게 감투를 안배하여 참여의식과 긍지를 높여 주는 등의 수법도 서슴지 앉았다.
4, 구체적 투쟁활동사실
가, 정부전복·내란선동
◇김대중은 4월7일 신민당결별선언을 계기로 사조직 중심의 비합법투쟁을 통해 정권을 탈취하기 위하여 그 중추적 기능을 담당할 사조직으로 국민연합을 자신의 지배 하에 두기로 전략을 확립하고, 4월10일 17시 윤보선 가에서 문철환·예춘호·이장영·심재권·고은태· 김종완· 계동제· 김윤직· 박형규· 이우정· 서경석· 김병걸 등과 회합한 자리에서 이들에게 4월7일 신민당결별선언을 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면서
▲3월 11일 신총리가 일본 산경신문 기자회견에서 『유신체제를 비호』하고 최대통령이 3월14일 정부측의 개헌 심위 개회식에서 행한 발언 등을 미루어 볼 때 향후 정국추이가 매우 불투명하므로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무엇보다 먼저 계엄의 조기해제와 유신 잔당제거, 정부개헌심의기구해체, 정치일정단축, 구속자 석방, 복권 등을 위한 투쟁이 선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총재는 안일하고 낙관적인 시국관을 가지고 있어 자신과 큰 견해차이가 있으며
▲당권파와 대립하면서 신민당 입당 노력을 계속할 경우 국민들에게 대통령후보에만 집착한다는 인상을 주는 결과가 되므로 신민당 복귀를 포기하였다고 설명,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국민연합에 복귀하여 민주회복투쟁에 전념하겠다고 위장하였다.

<「국민연합」을 개편, 사 조직화.
◇김대중은 국민연합복귀를 분명히 한다옴 동일 밤 8시 「파크·호텔」501호실에서 국민연합 내 심복 추종분자전원을 재차 소집하고 신민당 복당 포기와 국민연합복귀 및 민주회복투쟁합류를 지지하는 성명을 「국민연합」명의로 기자들에게 발표케 하는 한편 국민연합을 자기 중심세력으로 개편, 탈권투쟁을 위한 전열을 정비, 강화하는 방법으로 국민연합규약을 개정.
▲종전 3인 공동의장단 중심제로 운영하던 것을 중앙상위 중심제로
▲집행위원회를 중앙위원회로
▲소위원회를 상임위원회로 변경하고 중앙상위위원장에 심복추종분자 문익환을 임명하는 외에 한춘호·이문영·고은태·김승열·최열제 등 심복을 부위원장 등 요직에 배치하고 중앙위원도 한승헌·김윤직·한완상·김종완·이해동 등 심복30명으로 구성하였을 뿐 아니라 복학생인 장기표를 조직국장에, 심재권을 홍보국장에, 이신배를 사무국장에, 중앙위원을 겸한 조계우를 기획국장에, 그리고 민청협 부회장인 이신범을 총체적 배후 조종 책에 임명함으로써 공동의장인 윤보선·성양헌·양인이 「국민연합이 순수한 국민운동단체이지 어떤 개인의 정권도 득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없다」고 강경히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자기추종분자만으로 개편을 강행, 동 조직을 탈취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국민연합」을 차지한 김대중은 상임위위원장인 문익환과 조성우·이신범 등 행동 책을 연결하는 직선계통을 세우고 각 대학 복학생 회를 완전히 장악케 하여 이들이 전국 각 대학 총학생회를 통한 포섭조직과 소요사태 가두폭력시위를 배후 조종하였으며, 이들 국민연합세력이 여타 김대중 사조직과의 연계 하에 내란음모를 중추적으로 지휘 책동하는 사령탑 역할을 한 것이다.
◇김대중은 5윌1일 하오 6∼10시까지 자가로 문재환·이문영· 고은태· 한완상· 김종완· 예춘호· 이현배·장기표·심재권 등 국민연합 중추 「멤버」를 소집하고 이들에게 현재 각 대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주화대행진 시위 및 농성학생들에게 이제는 학내문제인 어용교수퇴진, 족벌 체제 타파 등 주장을 넘어서서 정치적인 「이슈」인 유신잔당퇴진, 계엄해제, 정치일정단축 등으로 전환토록 하고 교내시위를 교외로 유도하면서 시민을 이에 합세토록 선동하여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면 현 정부는 굴복할 것이니 선동·조종에 주력하라고 지시하는 동시에 전국적 일제 민중봉기의 결행시기는 5월 중순쯤 임시국회 개최 후로 하라고 지령하였다.
◇김대중은 5월3일 19시 자가로 국민연합 상임위원들을 재차 소집하고 국민연합 명의로 계엄해제, 정부개헌주도 포기, 정치일정단축 등을 요구하는 민주화촉진국민선언을 발표할 것을 모의하였고, 뒤이어 5월6일 15시에도 다시 회합하여 학생소요사태를 가열화 시키기 위해 5윌7일에 민주화촉진 국민선언을 발표하기로 확정, 5월7일8시 기독교회관에서 「뉴욕·타임즈」 서울특파원 등 내·외신기자 30여명에게 동 선언문을 발표하는 한편 심복 추종자인 김종원으로 하여금 동 선언문 5만장을 제작, 고려대학을 비롯하여 전국 각 대학과 각계각층에 배포하는 등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민중봉기를 선동하였다. .이 선언문은 김대중의 사조직을 통하여 하루만에 전국에 퍼져 그 날로부터 학생시위 구호와 주장에 일제히 등장하는 신속성을 보였다.
◇김대중은 이어 5윌12일 17시 「파크·호텔」 5백21호실에서 문익환·한춘길·이문수 등 측근참모전원을 소집하고 장기균·심재권 등 학원소요사태 배후 조종 책들로부터 학원사태 동향을 보고 받았는데
▲전국 26개 대학학생회장단 45명이 서울대학생 회관에서 5월11일부터 5월12일까지 철야 회의를 통해
-휴교령 발동 시는 단호한 투쟁을 전개한다.
-계엄해제와 정치일정의 명확한 발표를 촉구한다.
-학원사태해결을 위해 정부와의 대학로 국무총리면담을 요구한다.
▲5월16일에 다시 이화여대에서
전국대학학생대표들의 회의를 열어 새로운 투쟁방안을 협의하기로 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김대중은 이들에게 서울대·고려대·연대 등 각 대학의 시위동향을 예의 관찰 파악하여 학생소요사태를 폭력화시킴으로써 민중봉기로 확대토록 조종할 것을 지시하고 이를 위해 5월13일부터 학생소요사태를 가두시위로 격화시키도록 지령하였다.

<집권에 대비, 조각준비작업>
나, 과도정부 구상
◇김대중은 학원소요사태의 폭력화와 이를 계기로 한 민중봉기의 가능성이 충분히 성숙되었다는 판단하에 5월 1일 자가에서 문익환·이문영·한춘길 등 측근 참몰들을 소집. 「민주제도개정소」를 설립하여 정부전복 시 정권을 즉시 인수할 수 있는 과도정권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각분야별로 심복추종자들을 배치하였는데 이사장에 예춘호, 소장 이문영, 26명의 상무이사, 14명의 연구위원으로 구성된 민주제도연구소는
▲민족재생담당 박형규▲역사문화담당 백악청▲종교교육담당 서남동▲언론사회담당 송건호▲여성담당 이핵재▲민주정치담당 장을병▲노동담당 탁희전▲농업정책담당전인호▲경제담당임재경▲안보외교담당양호민▲통일담당 문왕환▲도의공치담당 안병무▲교육담당 한완상▲행정담당 이문영 등 각 분야별로 과도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자들로 임명하였다. 특히 김대중은 이들을 임명하는 자리에서 취임승낙서를 받는 형식을 취하여 충성을 다짐케 하였다.
◇김대중은 또한 그의 원내 추종분자인 이자돈이 5월5일 자가를 방문하여 「시국수습국민협의회」(고문 김대중 외 5명, 실행위원 문재환 등 3명)구성을 공식제의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현 헌법무효선언, 과도정부의 중립적 조직 등 현 체제 청산투쟁방안으로 할 것을 지시하면서 이에 대비하여 김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시국수습국민협의회를 구성하도록 획책하여 또 하나의 과도정부 구상을 구체화하였다. 이에 따라 이택정은 5월16일 이태원소재 중국음식점 「아량산」에서 이신범과 회합, 시국수습위원회 구성을 논의하였다.
다, 학원침투 배후조종 선동
◇김대중의 학원침투와 시위 조종 및 선동을 계획적으로 수행하는 전위행동대로서 3월5일 결성된 「민주연합청년동지회」는 전원이 복학생으로 조직되어 학원 가에 침투, 「데모」를 선동 조종하여 폭력화를 유도하는 외에 김대중 선동 선전자료의 학원 내 배포, 연설장 청중동원과 박수부대 조종, 시내 전단살포와 민심선동, 「데모」상황의 파악보고와 김대중 지령의 신속전달, 수행 등 전투적 전위행동대로 활약하였다.
◇「민주연합청년동지회」는 총책이 김대중 장남 김홍일 회장에 송창달, 조직책 권혁충의 선으로 김대중에 직결되어 자문위원회, 운영위원회, 집행부,.그리고 각 대학 책과 지방 각도 책으로 짜여져 있으며 서울대를 비롯한 국민대·중앙대·서강대 등 대학 책과 경기·충남북·경남북·전남북·부산 등 지방 책 모두가 복학생으로 배치돼 있는데 이들은
▲80년 3월초 김대중을 방문한 고대 복학생 박계동과 박일남에게 학원 「데모」자금 15만원을 주어 학원 「데모」를 일으키도록 선동하였고
▲박일남은 고대 총 학생회장 신계륜을 배후 조종, 가두 「데모」를 감행케 하였고,
▲80년 4월 중순∼5월초간 전후 3회에 걸쳐 수전대 총 학생회장 윤강연에게 「데모」자금 50만원을 주어 학생시위투쟁을 계속 전개하라고 교사하였으며
▲5월11일 서울대 총 학생회장인 심재철에게 과도내각이 구성되어 자신이 집권하게되면 문교부 요직으로 등용하겠다고 약속하고 「데모」자금 50만원을 주어 폭력시위를 선동하였다.
◇특히 이들은 김대중 지지기반의 확장과 선전자료인▲민주구국의길 2천부▲민족혼과 더불어 1만9천부▲김대중 연설책자 5만 부▲80년도 좌표 5천부 등을 학원 가와 시내 일원에 배포하여 봉기를 선동하는데 주역을 담당하였다.
◇김대중의 정권탈취를 위한 외곽전위조직의 하나로 전직 국회의원, 공무원, 교수, 재야법조인 등을 포섭하여 1월 하순에 조직된 「민주헌정동지회」는 회원이 무려 2만 명에 달하며 공동대표제 하에 지도위원, 실행위원으로 중앙을 구성하고 각도 책에 핵심추종분자를 배치하고있는데 공동대표에 예춘호·김종완·김윤직, 공동지도위원에 김상현·계동제·이영섭·양성우 등이 선임되어있다.
◇이들은 김대중의 「이미지」 부각과 개인선전을 위해 4월24일 신민당결별지지 성명서 10만 부, 5월7일 국민연합 명의의 민주화촉진국민선언 5만 부 등을 제작하여 전국조직을 활용, 주로 대학가에 배포함으로써 학생 「데모」를 유발케 하였고
◇부산 경남도 책인 우경규의 경우 작년 12월부터 금년 5월까지 3회에 걸쳐 김대중으로부터 조직확대 지시와 격려금 30만원을 받아 학생「데모」를 배후 조종하는 외에 부산대복학생 조태원을 포섭, 김대중에게 연결시켜 자금과 「데모」지령을 받아 활동케 하였다.
◇한편 「통일당」은 김대중 지시에 의해 5월14일 총재권한대행 김연영과 정책연구실장 전 대열이 통일당 명의로 『학생의 소리는 국민의 소리요, 민중의 소리다』 제하의 학생「데모」가열화를 촉진시키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뒤이어 5월15일에는 재차 현 시국을 수습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한다. 만약 이에 불응할 때는 거대한 행동에 돌입하겠다는 내란 사태 야기를 선동하는 대 정부 성명을 발표하는 등 학원소요폭력화·민중봉기에로의 확대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집권 후 특혜 약속, 자금 받아>
라, 자금 염출 및 「데모」자금 등 지급
◇김대중은 사조직 확대와 복학생을 통한 학원 「데모」선동 조종에 사용하기 위해 자금을 염출하기 위하여 자신이 집권하게 되면 경제적 이권 혹은 정부조직이나 각종중앙·지방관직을 주겠다는 약속과 국회의원 지방의회의원 공천을 확약하는 등 수법을 총동원하여 수많은 정치인·실업인·정치지망생들로부터 무려 12억 원 이상을 거둬들였으며
◇이 자금 중 3억 원 이상을 다음 추종자들에게 주어 학원소요조직 및 선동, 광주사태야기 등 목적에 사용토록 하였다.
▲예춘호 (원내세력포섭조직비) ▲이용희 (원외세력포섭조직비) ▲이문영 (정책연구실운영비) ▲한방헌 (선전책자제작비) ▲김홍일 (사조직조직비) ▲김쟁완 (민주헌정동지회조직비) ▲숙경규 (민주현정동지회조직비) ▲교동년 (전남대생데모자금) ▲심재철(서울대생「데모」자금) ▲송기원(중앙대생데모자금)▲윤여련(숭산대생데모자금) ▲박성혁 (서강대생데모자금) ▲심재권 (서울대생데모자금) ▲이승정 (한신대생데모자금) ▲박계속 (고대생데모자금) ▲신계륜 (고대생데모자금) ▲박일남 (고대생네모자금) ▲배기선 (국민대생데모자금) ▲김택춘 (서강대생데모자금) ▲이석표 (중앙대생데모자금) ▲윤용근 (외대생데모자금) ▲최만진 (명지태생데모자금) ▲안숙 (이대생데모자금) ▲조태원 (부산대생데모자금) ▲김봉우 (우희대생데모자금)
◇소위 정치자금 명목으로 헌납 받은 자금으로 자신과 가족의 「아파트」를 구입하는 등 개인용도에 쓴 것도 드러났는데
▲강남구한신공영「아파트」216동201호를 3천만 원에 구입, 장남 김홍일에게 주고,
▲혜성「아파트」1039호를 9백만 원에 전세 임차, 장남 김홍일에게 또 하나 주었으며
▲여의도수정「아파트」C동1401호를 3천만 원에 구입, 2남 김홍업에게 주었음이 드러났다.
마, 대중선동 선전 문건 살포
◇김대중은 자신의 선전책자와 정치활동 연설의 내용 등 대중선동을 위한 선동 선전 문건을 제작, 살포하기 위하여 심복 김상현으로 하여금 「한국정치문화연구소」를 외곽사 조직으로 설립하였는데 소장 김상현, 부소장 박정열·김창환외에 고문, 이사장, 부이사장, 기획위원과 사무국, 기획실, 정책연구실, 홍보실, 섭외 실 등 방대한 기구를 두고있다.
◇소장 김상현은 김대중으로부터 600만원의 자금을 받아 3월초부터 20대∼40대의 청장년 정치지망생을 포섭, 전국 시·군단위로 조직을 확대하여 5,000여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복직교수의 정치「세미나」를 빙자하여 김대중 추종분자를 양성하여 왔는데 이들은 김대중 선전소책자 6천 여부를 진국조직망을 통해 배포하고 YWCA, 한신대, 동국대 등에서 한 김대중 선동연설녹음 「테이프」를 제작, 전국에 배포하는 등 대중신동에 선봉을 서왔다.
◇김대중은 또 하나의 선동선전 문건을 전담 제작하는 기구로서 「정책연구실」을 설치, 김대중의 모든 연설문과 선전책자·선전전단 등의 문안을 작성하였으며 특히 학생시위를 면밀히 분석하여 단계적으로 주장하는 구호와 시위방법까지로 송출해 냈다.
또한 법률담당의 한승헌은 김대중으로부터 1천2백만 원의 자금을 받아 출판사를 설립하고 처 김송자 명의로 등록한 뒤 김대중의 선동선전 출판을 전담하여왔다.

<각계망라「지식인협의회」구성>
◇이밖에 김대중은 문인인 이호철, 전 언론인 송건호, 대학교수 전인호 등으로 하여금 소위 「지식인협의회」를 조직케 하여 회원 134명을 포섭, 5월15일 비상계엄해제와 정치일정 단축 등 학생시위의 폭력과 가열을 위한 시국선언을 발표케 하였으며, 이들의 서명을 받아 정식으로 지식인 협의회를 결성코자 하였다.
특히 김대중은 이들 지식인중 자가를 방문한 문인들에게 『글만 쓸것이 아니라 불란서의「앙드레·말로」가 제5공화국 정권을 지지하고 입각하여 정치활동을 하였듯이 당신들도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에 참여하여야 한다』고 선동함으로써 자기의 선동노선을 따를 것을 촉구하였다.
바, 핵심 친위분자 양성과 사병화
◇김대중은 가장 측근에 열성추종분자들을 배치하여 각종 사조직과 계보별 추종세력을 양성 관리케 하였는데 이들「비서실」과 「경호실」은 연락, 지령, 활동확인, 동향감시, 정보수집 등 활동을 담당하면서 김대중의 「이미지」부각과 선동을 위한 각종 자료의 준비 등을 해왔다.
◇비서실장에 예춘호. 흠장에 김재위·박종률, 경호실장에는 예비역 해병소장인 박성철을 임명하고 있는데 박성철은 1949년 김대중이 남노당 관련혐의로 구속 조사를 받고 있을 때 목포지역 해군헌병수장으로서 신원 보증하여 김대중을 석방케 한 자다.
◇이밖에 경호실 차장 함윤식, 정치비서 김형국, 정책비서 한화갑, 총무비서 김왕두, 의전비서 유동근, 공보비서 이협 등외에 동생과 장·차남을 비롯한 30여명의 경호원을 두고 있다.
◇이들 비서실과 경호실의 종사자들은 포섭을 필요로 하는 대상자를 동교동 김대중 가를 방문케 하고 김대중을 직접 면접케 하여 마치 김일성 「배지」를 연상케 하는 김대중 초상화를 양각한 「메달」 (신표)을 직접 수여케 함으로써 충성스러운 사병을 만드는 공작을 수행하였다.
이밖에도 대상자 개인의 비중에 따라 이름이 새겨진 「볼펜」, 「사인」이 들어있는 사진 등을 주고 정원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등 충성 분자 화에 주력하였다.
◇이들은 서울종로구낙원동 거주 박사도에게 김대중이 집권하게되면 서울시의회의원 공천을 준다는 조건으로 김대중의 초상을 조각한 「메달」(신표)5,000개(시가 1백75만원)를 만들어 상납하게 하였다.
사, 언론계 침투 포섭조종
◇김대중은 언론계내부의 동조세력 부식을 위하여 2월 언론인출신 국회의원 조세형과 신문학교수 이영납에게 언론인을 포섭하도록 지시하였다. 4월경 조세형은 경향신문조사국장인 좌익성향의 서동구를 포섭, 동조분자를 만들어 접촉케 하였으며, 김대중은 이들에게 집권 후 신문사설립을 약속, 격려하였다.
◇또한 서간구는 김대중의 격려를 받은 후 자신이 근무하는 경향신문·문화방송의 외신부장 이경-,보도부국장 여성대 등 간부와 사회부기자 오핵진 등 6명의 기자를 포섭, 불법적인 신문제작 거부를 선동하여 언론파동을 획책하고 악성유언비어를 유포하였다. 역시 동조분자인 동아일보 심송무, 동아방송 박종렬 등도 김대중을 추종하면서 북괴노선을 지지 동조하는 행동을 자행하다가 당국에 검거된바있다.
◇한편 김대중은 기자협회도 포섭하여 내란음모의 시기에 맞춰 5월20일 전 언론기관이 일제히 제작거부를 단행하도록 조종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5, 김대중의 사상성분 및 배경
김대중은 그 동안의 공식활동과정에서 자신이 가장 민주주의 사상에 투철한 것으로 주장, 국민을 현혹하여 올바른 선택 안목을 흐리게 하여 왔으나 금번 수사과정에서 확인된 바에 의하면 김대중은 8·15해방직후부터 좌익활동에 가감한 열성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은 차지하더라도 근래에 와서도 해외에서 북괴의 노선에 동조하는 반국가 단체를 만들고 불순분자와 접촉하는 등 극히 위험하고 음흉한 반민족적 반국가적 행동을 자행하였음이 여실히 증명되고 있는바 그 실상은 다음과 같다.
가, 과거 좌익가담 활동사실
◇김대중은 해방직후 좌익계인 「건국준비위원회」목포지부에 가입, 선전원으로 종사하면서 목포청년동맹에 가담 활동하였고 건준이 해체된 후에는 「신민당」(남노당의 전신, 위원장 김두봉은 후일 북괴부주석 역임) 목포시 당에 입당, 조직부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공산계열인 「민주청년동맹」목포시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김대중은 1946년10윌1일 발생한 목포별채서 남교동 파출소 등 빈 경찰관서 습격사건 시 경찰관 살해 및 파출소 방화를 배후 조종한 혐의로 체포되어 구속, 조사를 받던 중 한민당 시 당부 위원장인 강인 차보윤의 도움으로 풀려 나온 일이 있으며, 1949년2월 사상적으로 전향한양 보도연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하여 총무부 차장으로 위장하였다.
◇그러나 김인중은 그 후에도 전남 신안군 임자면 출신으로 남노당 섭외부장 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으로 지하에서 암약 중이던 전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하는 등 본색이 드러나 전남도무에 체포, 구속 중에 당시 해군목포헌병대장이었던 박성철 (현 김대중경호실장)의 신원보증으로 방면된바 있다.
◇1967년 제7대 국화의원 선거에 입후보하였을 때에는 정계침투를 기도하던 북괴간첩인 정태묵 (1972년12월8일 대법원에서 간첩죄로 형 확정되어 사형)과 2차에 걸쳐 접촉하면서 그에게 지지표를 모아달라고 요청, 지원을 받은 사실도 드러나고 있다.
나, 반 국가단체구성 및 동수 차로 취임
◇김대중은 1972년 10월1l일 지병인 관절염 치료를 구실로 도일, 미·일 등지를 5차에 걸쳐 왕래하면서 해외거주 친북·반 국가교포들을 조직화하여 소위 해외망명 정부수립과 용공 세력을 토대로 한 지원세력 확대활동을 전개하여 미·일조야 내에 확고한 지지기반 구축을 획책하고 국내 반정부세력을 육성 강화함으로써 「외세의 압력과 내부봉기에 의한 혁명적 방법으로 국가를 전복하여 정권을 탈취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반 국가활동을 전개하여온바 이의 제1단계로서
▲재미교포로서 북한을 방문하는 등 북괴동조자인 이근팔·우광욱·임창영·고병철 등과 망명공부적성격의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동민회의」를 결성(73년7월6일), 김대중이 준비위원장에 취임하였고,
▲재일교포 중에는 조총련의 배후 조종을 받아 민단을 파괴하고 「민족시보」 등 발간을 통해 북괴의 선전활동을 전개하고 수시 북괴를 내왕한 바있는 곽간의를 위시하여 배속호·김재화·정재준·김돈충·조활준·김은택·김군부 등 소위 「베트콩」파들과 결탁,
-한반도 중립화, 김일성이 주장한 남북연방제에 의한 점진적 통일실현 .
-민주헌정회복 등을 주장하면서 한민통 일본본부결성을 강조하여 1973년8월13일 동 일본본부 발기인대의에서 의장에 추대되고 부의장 겸 의장대리에 김재화, 부의장에 정재준·김용원, 상임고문에 배동호 등이 선출되었다.
◇특히 김대중은 1972년 10월쯤부터 1973년8월쯤까지 사이에▲김종충으로부터 일화 1천5백 여만「엔」▲배동호로부터 일화5백60여만 「엔」, 미화3천 「달러」 및 ▲그들의 주변인물로서 북괴를 드나들고있는 곽동의와 김재화·조활전 등으로부터 모금한 일화2천5백30여만「엔」등 도합 일화 4천7백40여만「엔」을 북괴 또는 조총련 등으로부터 유출된 불순자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제공받아 그 자금 중▲일화9백 여만「엔」상당은 「한민통미주본부」 결성에▲일화1천8백40여만 「엔」은 「한민통일본부」결성에 각각 충당, 사용합으로써 반 국가단체의 지령을 받은 자들로부터 금품을 수수하여 반 국가단체를 구성하였다.
◇김대중은 귀국후인 1973년8월14일 김종충으로부터 『8월13일 당초 예정대로 한민통 발기대회를 개최, 의장에 선출되었다』는 보고를 받았고, 동년 11월초 자가를 방문한 일본신문 서울특파원으로부터 『지난 8월15일자 일본 각 신문지상에 동경 「히비야」 공화당에서 한민통 결성대회가 개최되고 김선생이 의장으로 추대되었다』라는 말을 듣고 반국가 단체 수괴로 선출되었음을 확인한 이후 계속하여 인편 및 전화·서신 등으로 수시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려 반 국가단체수괴로 있으면서 통신을 지속하는 등 관계를 유지하여 왔다. 특히 김대중은 1978년12윌27일 처 이희호로부터
▲「한민통 일본본부」가
-주한미군은 민주회복과 국토통일에 저해가 되므로 철수해야 한다.
-한반도를 중립화하여 남북연방제에 의한 점진적 통일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1978년6월13일 우리나라 대법원에서 간첩 금정사사건을 심리시 한민통 일본본부를 반 국가단체로 판시하였다는 말을 듣고 반 국가단체인 「한민통 일본본부」가 계속 북괴의 미군철수 주장 및 연방제 통일방안에 동조하고 법적으로 반 국가단체로 규정된 사실을 확인하고서도 계속 인편 및 전학·서신 등으로 수시 보고를 받고 지령을 내리는 등 관계를 지속하였다.
◇그 후 김대중은 국내에서 「한민통」이 북괴노선을 추진하는 반 국가단체로 문제가 되어 자신에게 불리한 요소가 될 것을 우려, 의장을 개체하도록 지령하여 1980년3월24일 「한민통일본본부」 제8회 임시 중앙위원회에서 동의장이 김재화로 경질될 때까지 반 국가단체수괴로서 종사하였다.
◇또한 김대중은 1979년8월쯤 일본의 반한 정치인으로서 북괴 김일성의 일본 내 대변인 격인 우부관덕마 통일당 소속 국회의원 김녹영을 통하여 자신에게 보내져 온 것만도 일화20만「엔」과 1980년4월초 미국「메릴랜드」거주 처남 이성호로부터 방한하는 미국인 편을 통해 보내져온 미화1만「달러」등을 적법절차에 의하여 환전하지 않고 미화2천7백「달러」를 해외여행자에게 제공하는가 하면 잔여 미화7천3백 「달러」와 일화 2O만「엔」을 자가에 감추어 불법 소지함으로써 외국환관리법을 위반하였다.

<조총련계의 자금도 흘러들어>
다, 해외 주요 발언 내용
김대중은 1972년10월11일 지명인 관절염 치료를 구실로 도일, 체류 중 10월 유신을 맞게되자 귀국을 단념하고, 1973년8월 귀국 시까지 전후 5회에 걸쳐 미국과 일본을 내왕하면서 「조국의 민주회복을 이룩하고 남북통일촉진을 위하여 해외민주세력은 단결해야 한다」는 주장아래 해외 반한 교포를 규합 조직하고 미·일 조야의 반한 정치인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반한 여론을 조성, 대한민국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동시에 규합된 조직을 활용, 정부를 전복하여 정권을 탈취하려는 의도 하에
◇1972년11월10일 동경외신기자구락부 연설을 통하여 『미국과 일본이 한국에 대한 종래의 경제·무기지원의 정책적 과오를 청산하지 않고 일대전환을 하지 않는다면 자유도 빵도 없는 아세아 각국의 인민은 빵이라도 보장되는 공산주의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1973년2월23일「뉴욕·타임즈」지와의 대담을 통하여 『한국이 자유도 빵도 없는데 반해 북한은 비록 자유는 없다고 해도 빵이 보강된다. 나의 이러한 입장은 북한공산주의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1973년3월21일 재일 한국청년동맹이 주최한 입관법연수회 강연에서 『나는 결코 통일하면 공산당을 죽이는 그러한 반공통일을 하자는 것도 아니요, 승공통일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우리도 공산당의 존립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이북에 김일성 주석을 중심으로 한 엄연한 정권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1973년3월23일 동경외신기자구락부 기자회견 및 1973년4월14일 미국 「콩코디아」신학대학강연을 통하여 『나는 남북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고 세계각국과 대등한 외교를 맺을 수 있는 연방제 확립을 주장한다.』
◇1973년4월24일 미국「시애틀」소재 「워성턴」대학 및 1973년7월6일 「메이·플라워·호텔」에서의 재미 한민통 발기인 대회 강연에서 『한국은 북한이 주장하는 연방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의 6·23외교선언은 동서독처럼 남북분단을 영구화하는 것이므로 반대한다. 괴뢰, 괴뢰하면서 무슨 놈의 괴뢰냐, 공산주의란 기존사실을 우리는 27년 간이나 무시해왔는데 이북은 공산당으로 안정되어 있으나 이남은 민주체제도 안정되지 못했고 오히려 혼란과 불안, 민생고만 극심할 뿐이다. 또한 김일성이 주체성 등을 확립시킨 것은 잘 한일이 아니냐.』
◇1973년 4월 중순 미국 「자유공화국」지 발행인 강영채와의 대담을 통하여 『북한의 세계보건기구 및 국제의원연기가입은 환영해야할 일이다. 국제사회 진출을 막을 필요가 무엇이냐, 북한은 앞으로 「유엔」산하 13개 기관에 모두 참가하게 될 것인데 이는 환영해야 할 일이며 우리 스스로가 북한의 가입을 요구해야한다.
◇1973년5월18일 미국「샌프란시스코」국제학생회관 강연을 통하여 『내가 집권하면 남북연방제와 대중경제를 실시하겠다. 교포들은 앞날의 수권태세를 확립하여야하며, 그 방법으로는 청와대와 백악관에 계속편지를 내어 항의하여야 한다. 특히 경제원조의 부정사용에 대해서는 백악관에 이를 항의하여 중단토록 주장해야 한다.』
◇1973년5윌21일 미국「코리아·저널」지 및 1973년7월1일 한민신보와 대담을 통하여 『남북은 한반도의 외군 철수, 쌍방정권의 인정, 정치·경제 제 분야의 전면적 교류를 통해 급속한 동질성을 회복하여 연방공존제를 만들고 통일후의 5년 동안은 양국정부를 세워야 한다.』
◇1973넌7월3일 일본에서 자신이 집필한 「독재와 나의 투쟁」제목의 책자발간을 통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위해서는 연방제를 만들어야 하며 북한이 종례부터 주장해 온 남북평화공존과 교류, 그리고 민족화해주장 등은 나의 통일관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등 한결같이 북괴의 통일노선과·선전, 선동에 동조하는 주장을 하였을 뿐 아니라, 북괴와 그 수괴를 찬양지지하고 동경하는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반국가적이며 용공적인 자신의 발언주장과 행태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국내에서 가장 반공 적이며 자칭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듯이 위장 행세하여 온 것이다.
6, 당부의 말씀
이상과 같은 수사당국의 수사결과에 의하여 김대중 및 그 추종분자 일당의 조직적인 내란음모의 전모가 명백해 졌으며, 10·26사태 이후 국가가 미증유의 위기사태에 처해있는 엄연한 사실을 추호도 고려함이 없이 자신의 집권야욕 달성에만 광분하여 학생소요 사태의 배후에서, 그리고 광주사태의 발단과 그 격화과정의 배후에서 폭력혁명을 유발하려던 반민족적 반국가적 작태가 백일하에 폭로되었다.
김대중은 그 동안 정부가 국민여망에 부응하여 새 시대를 향한 정치일정을 내외에 공약하고 이를 착실히 추진하고 있는 사실도 온갖 비방과 날조된 유언비어유포로 국민을 현혹시켜 불신케 하는데 혈안이 되었을 뿐 아니라 특히 선량한 학생들을 선동하여 자신의 야욕달성에 악용하는 등 그가 내세운「민주회복」주장이 한낱 내란음모와 정권탈취의 목적을 위장, 은폐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였음이 낱낱이 밝혀진 것이다. 이와 같은 이들의 음모로 말미암아 우리의 국가안보와 국민생활은 일대위협에 직면하였을 뿐 아니라 경제의 침체는 가중화 되었으며 국민생활의 모든 분야에 크나큰 악영향이 계속되고 있고 허다한 인명과 재화의 손실까지 입는 국가적 불행을 경험하였다. 이와 같은 반국가적 망동분자가 자유와 민주주의 미명아래 획책하는 이 엄청난 파괴적 행태와 선동에 국민여러분과 특히 학생들은 다시 한번 경각심을 일깨워 현혹되지 않으시기를 당부 드리며 아직도 도피중인 관련자들은 하루빨리 수사 당국에 자수하여 전비를 용서받고 밝은 내일을 되찾도록 할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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