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닐라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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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필리핀」사람들도 여간해서 정부가 발표하는 통계숫자를 믿으러 들지 않는다.
기념품가게 점원에게 지난해 물가가 얼마나 올랐느냐고 묻었더니 잠시 생각 끝에『적어도 30%이상』이라고 대답했다.
『정부 발표로는 18.8%던데…』라고 되묻자 점원은 그저 「픽』웃기만 하면서 하던 일을 계속했다.
더 이상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실업율에 관한 기사가「필리핀」신문의 보도관제 사항이라는 말을 들었다. 또 알려고 들 하지도 않았다.
「마닐라」 교외의 빈민촌을 가보고 싶다고 안내원에게 청했더니 『당신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한마디로 거절했다. 이곳의 교민들도 위험해서「마닐라」밖을 나가는 일이 거의 없다고 했다. 부자촌이라도 보자고 해서 따라 나섰다.
나무 그늘 밑이 35도라는 폭염인데도 관자가 모여 사는 동네는 날씨마저 선선했다. 약간 구릉진 지대에 2km정도의「아스팔트」길을 양옆으로 끼고 늘어선 부잣집들은 울창한 야자수 숲으로 폭 감싸여 있었고 한참을 가야 다음 집 대문이 나올 정도로 엄청나게 큰집들이었다. 집집마다 정문에는 사병들의 초소가 있다. 한남동의 외인촌 같았다.
이 근처를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얼씬거리다가는 도둑취급을 받기가 십상이지만 일반서민들은 자기들대로 이 동네 「도둑촌」이라고 불렀다.
「마닐라」부자는 자정 전에 자는 법이 없다. 생활시간대도 빈부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서민의 하루 일과는 따가운 햇볕과 함께 해야 하지만 부자의 활동시간은 시원해지는 저녁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마닐라」시 중심부에는 큼직큼직한 현대식 「빌딩」들이 많다. 운전사는 큰「빌딩」 앞을 지날 때마다 『동양최대』라는 표현을 자주 쓰면서 짧은 영어로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많이 듣던 말이었다. 정말 훌륭하다고 맞장구를 쳐줬다.
「마르코스」신봉자임을 자처하는 이 운전사는「코리아」의 박대통령도 잘 안다고 말했다.
이 나라 동양최대 중의하나가 바로 ADB(「아시아」개발은행) 총회가 열리고 있던 「필리핀」국제회의장「빌딩」. 웅장하기와 화려함은 얼핏 세계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 싶었다. 이건물 역시「마르코스」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필리핀」국력을 세계에 과시하고 최근에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치할 국제회의가 절대 부족한 것이 고민이었다.
임금인상율도 대통령이 결정한다. 특히 지난해의 경우 7년째의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종교계와 학생들의「데모」격화로 정정이 불안한데다 「오일」파동으로 물가품귀까지 겹치자 기업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업종별하한「가이드·라인」을 설정해 강제로 봉급을 올려버렸다. 선무용이었다.
이 때문에 종래「마르코스」를 지지하던 상당수의 기업인들도 등을 돌리고『경제를 모르는 무식꾼』이라고 몰아붙이고 있지만 그는 그럴수록 여전히 소신 있는 대통령임을 강조하고있다.「필리핀」경제를 「마닐라」경제니, 「마르코스」경제니 하는 표현도 납득이 갔다.
전체 제조업의 부가가치중에 절반이「마닐라」에 집중되어 있고 아직도 절대빈곤층이 전 인구의 30%나 된다고 한다.
쌀 걱정도 없고 이렇게 풍족한 자원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안타까운 생각마저 들었다.
여건이 비슷하면서도 「인도네시아」 나 「말레이시아」보다 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마닐라」시의 표면적인 화려함이 오히려 「필리핀」의 고민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자국어보다는 영어쓰기를 더 자랑스럽게 여기고 혼혈보다 순수 「필리핀」인임을 도리어 부끄러워했다.
정치문제와 관련해서 지식층들은 「마르코스」가 최근 「호놀룰루」에서 외신기자들과의 회견을 통해 밝힌 「연내계엄해제가능성」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는 정적의 압력보다는 도심지거리마다 행인들을 붙잡고 손을 내미는 어린동냥꾼들 문제가「마르코스」의 진짜 고민일 듯 싶었다. <이장규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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