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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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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육당이 엮은 『역사일감』의 6월 초 하루 편은 시조 한 수를 소개하고 있다.
일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구절양장(구절양장)이 물 도곤 (보다) 어려워라/이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 갈기만 하리라.
작자 장만은 광해 주치 하의 난정 시절, 병을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 그 심정을 시 한 수로 읊었다.
시절은 어느덧 그 지루하고, 창연한 5월도 지나고, 한 여름의 초인에 들어선다. 기온마저 서둘러 30도를 오르내리는 요즘이다. 우리나라의 여름은 더위와 장마와 태풍의 전주곡으로 이어진다. 무덥고, 답답하고, 긴 여름.
이런 여름이 딴 미국에선 흔히 인종분쟁이 일어난다. 갖가지 범죄도 마찬가지다. 겨울보다는 여름이 더 비인간적인 것도 같다. 사람들은 무더위 속에서 사뭇「히스테릭」해 지는 것이다.
그러나 더위며 추위는 기상의 변화이기에 앞서 우리의 감수성에 의해 더 민감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마음이 메마르고, 막막하면 더위도, 추위도 온도계의 그것보다는 한결 더해진다. 마음이 후련하고, 탁 트이면 비록 수은주가 30도를 넘어도 시원하게 느껴질 것이다.
중국의 문장가 김성탄의 『서상기』평석 속에 나오는 「33절」이 생각난다. 사람이 호쾌함을 느낄 수 있는 사례들을 33가지로 늘어놓은 글이다.
때는 6월 어느 무더운 날, 태양은 중천에 걸려 있고, 산들바람 한 점 없는데, 나는(비) 새도 없고, 돗자리는 눅눅하고, 파리는 웅웅 날고…,이때 우당탕탕 쏟아지는 소나기.
앞마당의 파초잎사귀.
대로에서 싸우는 부랑배들을 야단치는 누구의 대갈일성.
아침에 눈을 뜨니 누가 죽었다는 수군댐. 바로 그 동네의 제일 가는 타산꾸러기가 죽었다는 소식.
습진이 생긴 피부에 더운 김을 쐬는 기분.
벌판에 야화가 붙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는 일.
방안에서 말벌을 쫒아 내는 일…. 아직도 김성탄의 수다스러움은 끝나지 않았다. 중국인의 넉살좋은 호걸 풍이 차라리 부럽다. 더위 따위를 이겨내는 그들 나름의 지혜가 있는 것이다.
새삼 더위며, 추위에 얽매여 사는 우리의 일상이 적막해 보이기만 한다. 필경 우리는 계절을 잃고 사는 지도 모른다.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는 시절은 그렇게 멀기만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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