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세상] '언론과의 전쟁'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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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언론의 자유에는 오보의 자유도 포함돼 있다." 사회책임이론 태동에 토대가 된 '허친스(시카고대 총장) 보고서'에서 취재.보도 환경의 제약 조건으로 인한 오보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 오보 때문에 언론의 자유가 위축돼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 대목이다.

모든 학문 이론이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듯이 언론의 보도에도 오보의 가능성이 근본적으로 내재돼 있다.

물론 보도 전에 오류를 검증하려고 최대한 노력하지만 여건상의 한계로 항상 완벽한 보도를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권위지일수록 오보에 대한 정정 및 사과보도를 충실히 하고 있다.

최근 청와대가 정부 각 부처에 기사의 성격을 '건전 비판''악의적 비판''오보' 등 다섯가지로 분류해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것이 언론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왔는지, 혹은 문화관광부.국정홍보처의 '새 홍보시스템 운영방안'과 궤를 같이하면서 '언론과의 전쟁'을 치르려는 의도인지 그 진의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지시는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먼저 어떤 근거와 잣대로 '오보'를 판단할 것인가다. 국가 권력의 부인 또는 은폐로 한때 오보로 치부됐던 기사들이 훗날 진실로 밝혀진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최근 '중.고교 예체능 과목 점수.석차 폐지 추진' 기사다. 이는 중앙일보가 1월 9일자 1면에 보도한 특종기사였다.

그러나 기사가 나간 당일 교육인적자원부가 "검토한 바 없다"고 극구 부인해 결국 '오보'가 됐고, 1월 25일에 독자들에게 '사과' 보도까지 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난 4월 10일 교육부는 이 방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해 다시 '특종'으로 살아났다.

비판 기사를 건전과 악의로 나눠 보고토록 한 것은 더 심각한 문제다. 기사를 쓴 기자의 속내까지 따져 봐야 하는데 그 잣대야말로 시쳇말로 '엿장수 맘대로'일 수밖에 없어서다. 공보관들이 '건전한 비판'과 '악의적 비판'을 매일 판단, 보고토록 의무화한 조치도 위헌 논란 가능성이 있다.

정부가 하는 일 자체가 항상 올바른 것은 아니기에 공무원에게 이 같은 판단을 강요하는 것은 공무원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인격권 침해와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론이 '악의적 오보'를 하는 경우 당사자가 법적 소송을 하면 된다. 그 판단은 법원이 내릴 일이지 정권이 나설 일이 아니다. 최근 고건 총리가 취재 시스템 개선에 앞서 "공직사회가 먼저 정보공개나 절차의 투명성을 제고하라"고 주문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정부의 미디어정책 담당자들은 북핵과 경제 등 위기적 상황에서 국가 성장 동력인 디지털 방송산업 발전과 남북 언론교류 등 국가적 어젠다에 우선 눈길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김택환 미디어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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