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순천서 벌어지는 저급한 '예산폭탄' 논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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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7·30 재·보선 순천-곡성에서 벌어지는 여야의 ‘예산폭탄’ 논쟁은 한국 정치의 후진적 수준을 보여준다. 여야의 이른바 ‘실세’가 국가 예산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공공연히 자랑하고 이를 버젓이 공약하는 게 최대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문제를 촉발한 이는 새누리당 이정현 후보다. 그는 10년 가까이 ‘박근혜의 입’으로 불리는 측근이며 최근까지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냈다. 새누리당이 안고 있는 호남 열세를 극복하려 그는 지역개발론을 내세웠다. ‘예산폭탄’을 퍼부어 순천을 확 바꾸겠다고 공약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4000억원이 필요한 순천대 의대 유치, 순천만 공원의 국가공원화, 180억원이 드는 정수장 통합 등이다.

 현역이든 후보든 지역개발을 위한 예산 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건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범위를 넘어 예산을 특정지역에 과도하게 투입하는 왜곡을 자행할 우려를 준다면 이는 위험한 것이다. ‘예산폭탄’은 이 후보가 대통령 측근이니까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측근이니까 특별한 영향력을 ‘폭탄’처럼 발휘할 수 있다는 거라면 이는 분명 ‘예산 왜곡’이다. 일부 실세가 자신의 지역에 예산을 불균형하게 많이 가져가면 수많은 다른 지역은 피해를 보는 것 아닌가.

 예산폭탄 논쟁이 더욱 심각한 건 야당도 똑같은 수준으로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박영선 원내대표는 자신이 야당의 표결권을 지휘한다는 점을 이용해 예산폭탄을 선별적으로 사용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는 “(이정현 후보가) 순천에 예산폭탄을 준다는데 그거 마음대로 할 수 있나. 내가 반대할 것”이라며 “(대신 우리 당의) 서갑원 후보를 국회로 보내주면 찬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새누리당 후보를 뽑으면 예산 배정을 막겠다고 위협하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국회의 예산동의권을 주도하는 야당 지도자라면 여야에 따라 예산을 선별적으로 주무르겠다고 해선 안 된다. 대신 어떤 경우에도 예산이 자의적으로 배정되어선 안 된다는 원칙론을 설파해야 한다. 국회 예결특위에서 새정치연합 장병완 의원은 최경환 경제부총리에게서 예산 편성의 원칙론을 확인하고는 “경제부총리는 대통령의 남자라 하더라도 예산폭탄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주장했다. 이런 식의 접근이 옳은 것이다. 박영선 대표는 논쟁의 수준을 저하시켰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에서는 국가 예산에 자의적인 손길을 가하려는 여야의 행태가 고질처럼 반복되고 있다. 일부 실세는 정부의 예산 편성에 압력을 넣고, 여야 할 것 없이 예결위원들은 지역 예산을 권리처럼 챙기고, 일반 의원은 막바지에 예결위에 ‘쪽지’를 넣어 지역개발 예산을 극적으로 취득한다. 거센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야 정치인이 이를 마다하지 않는 건 이런 행동이 지역의 득표에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산폭탄’ 같은 저급 논쟁을 없애는 데는 유권자의 의식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