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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당 박노성 형님을 추모함|김종대 (전 대한상의부회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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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형님」하고 브르면 꼭 「동생」하면서 시작하신 다정한 음성을 영영 들을수없게되었읍니다. 우리의 형제결의는 오래전 이동생의 선고께서 하명하신 일이 아닙니까. 일주일이 멀다하고 만나서 담소할 일도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말았읍니다.
지난4월23일 점심때 찾아뵙고 여러가지 많은 이야기를 하지않았읍니까. 그때 「건강이 회복되시면 무엇을 하시겠읍니까」란 물음에 「없는 재산이나마 정리해서 자선사업을 하겠네」 하시면서 「지난날 내가 잘해주지 못한 일들을 뉘우치고 있지」라고도 말씀하셨읍니다. 정말 착하고 다감하신 성품의 발로였다고 생각합니다.
형님은 산고수려한 경남산청군단계소재 명문 순천박씨의 후에로 일찌기 한학을 익히신후 부산제이상업에 입학하신 준재로서 다시 육춘의 뜻을 펴기 위해 경성고상 (현서울대학교상과대학)을 졸업하셨읍니다. 온화한 성격에 수려 단정한 용모, 총명한 두뇌는 세인이 주지하는 일입니다.
해방직후 금융계에 투신하시어 그 불굴의 노력과 치밀한 지혜로써 드디어는 제일은행장의 중임을 맡게되어 큰 업적을 남기셨읍니다. 근자에는 대우 「그룹」의 회장으로서 또한 동양투자금융의 사장으로서 실로 많은 활약을 하셨읍니다.
형님은 학창시절부터 공부뿐만 아니라 다재다능하셨읍니다.
유도의 강자로서 또는 축구선수로서 총횡의 활약을 하였을뿐만 아니라 형님이 즐겨 암송하신 소동파의 적벽부 시의 그 낭랑한 목소리을 또 언제 들을수 있겠읍니까. 언제나 검소한 생활태도와 겸손한 행동거지는 우리들에게 훌륭한 사표였읍니다. 국제서도협회한국본부회장이라는 중책을 맡으실, 정도로 달필이어서 언제나 지단묵연을 멀리하지 아니하였으며 지난 76년부터 해마다 5월이 오면 태평양경제위원회(PBEC)회의에도 참석해 한국의 경제외교에도 힘쓰지않았읍니까. 값진 인생을 살고 가셨다고 하겠읍니다만 64세의 일기는 너무나 짧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좋은 친구와 마음터놓고 이야기하며 자기가 맡은 일에 언제나 최선의 노력을 다 하시겠다고 다짐하신 형님, 무엇이 바빠서 그렇게도 홀연히 떠나셨읍니까. 형님을 사모하는 마음 끝이 없읍니다. 형님이 아끼고 사랑하던 가족은 물론이요, 우리 동창친지를 비롯해서 형님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목을놓아 통곡하고 있읍니다. 형님, 부디 명복을 누리시고 고이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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