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배꼽 가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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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벼락출세를 한 사람이 옷을 맞추러 양복점엘 갔다. 재단사가 치수를 재더니 손님에게 물었다. “감투를 쓰신 지 얼마나 됐나요?” “그게 옷과 무슨 상관이 있지요?” 어리둥절한 손님에게 재단사가 말했다. “처음 출세한 사람은 가슴을 앞으로 힘껏 내밀고 고개를 잔뜩 치켜들지요. 그래서 저고리 앞쪽을 뒤쪽보다 길게 만들어야 합니다. 얼마쯤 지나면 내밀었던 가슴이 들어가고 앞을 똑바로 보게 됩니다. 그땐 앞뒤 길이를 똑같이 만들지요. 시간이 더 지나면 가슴은 편안히 두고 고개를 숙여 아래쪽을 살피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저고리 뒤쪽을 더 길게 만들어야 몸에 맞게 된답니다.”

 베트남 민화라는데, 그네들이 우리보다 수준이 높은가 보다.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고개가 하늘을 향하는 사람들 천지인데 말이다. 이는 인격을 넘어 국격에까지 들어맞는다. 생각할수록 창피한 노릇 아닌가. 베트남처럼 현명한 재단사가 없는 우리 대한민국은 그동안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배꼽을 드러낸 채 우쭐대고 있었던 것이다.

 침몰하는 배에서 가장 먼저 탈출한 선장도 그렇고, 배 안의 승객들을 구경만 한 해경도 그렇다. 전우들에게 난사한 병사가 무서워 달아난 소초장도 그렇고, 지휘관은 놔두고 병사들에게 오인사격 책임을 묻는 군 수뇌부도 그렇다. 평생 욕심대로 살았던 건 잊고 벼슬까지 탐내다 망신당한 공직 후보자들도 그렇고, 자신이 지명해놓고 후보자가 자진 사퇴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임명권자도 그렇다.

 압권은 검경이 합작한 슬랩스틱 코미디다. 시신을 발견해 놓고도 40일 넘게 찾는다고 법석을 떤 경찰이나, 별장에 숨었다는 사람이 차분하게 소파에 앉아 수사관들을 기다릴 거라 믿은 검찰이나 다 똑같다. 그 둘이 왜 지금까지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는지 이해가 간다.

 어이없고 창피하지만 그게 우리의 민낯인 거다. 그게 우리 수준이고 실력인 거다. 그러면서 세계적 수준인 양 잘난 척했던 거다. 아시아권이 아니면 16강에도 들지 못할 실력으로 4강을 쳐다봤던 게 우리 축구뿐만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경제학자 존 갤브레이스는 “불황의 효용 중 하나는 회계감사관이 못 본 걸 보여준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거품이 꺼져야 속살이 보인다는 얘기다. 세월호를 알기 전엔 우리가 이 정돈지 알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보려면 좀 더 통렬하고 처절하게 돌아봐야 한다. 뒤가 짧은 옷은 고사하고 앞뒤가 같은 옷을 입고서 배꼽을 가릴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이훈범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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